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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04/23/18  

지난 여름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사 온 이후로 줄곧 별로 유쾌하지 않은 경험들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얄궂게도 좋은 것보다 안 좋은 게 먼저 눈에 들어오는 탓인지 꽤나 오랫동안 불편한 것들만 호소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종종 그리 하게 될 것 같다. 오늘은 모처럼 한국에서 우리가 누리게 된 편리하고 즐거운 선물같은 특권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미국에 살 때 우리 집이 있던 커뮤니티 안에는 수영장, 클럽하우스, 작은 공원과 놀이터 등이 있었다. 조금만 걸으면 그런 시설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곳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차를 이용해야했다. 차로 5분 거리에 위치하면 무척 가까운 편이였기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켓에 갈 때 “집 앞 마켓”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아파트에 살아보니 정말 집 앞에 모든 것이 다 있다. 우리 아파트에서 걸어가도 5분 이내 거리에 은행, 병원, 제과점, 세탁소, 식료품을 파는 미니 마켓, 문구점, 음식점, 야채가게, 각종 학원, 미용실, 부동산, 목욕탕 등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업체들이 모여 있어 차가 없어도 생활에 필요한 일들을 불편 없이 볼 수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의 운동장이 내려다보일 만큼 학교 가까이 살고 있어서 아이들은 수업을 마치면 걸어서 5분 정도면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매일 방과 후에 다니는 태권도장은 아파트 단지에서 나가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되기 때문에 엄마가 따로 라이드 걱정을 할 필요가 없고, 더구나 도장 측에 라이드를 요청하면 무료로 도장 셔틀버스가 아이들을 픽업하고 데려다 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방과 후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친구를 집에 데려 오기도 하며 심심한 주말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하면 혼자 걸어서 친구네 집에 갈 수도 있다.  혼자 집 앞 문구점에서 필요한 준비물을 구매하기도 하고 아빠의 캔커피 심부름도 할 수 있으니 미국에 살 때와 비교하면 아이들에겐  엄청난 자유가 생긴 셈이다.

 

미국에 사는 동안 아이 넷을 키우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느껴질 때는 아이들 라이드 문제에 봉착할 때였다. 세 명의 아이가 같은 초등학교에 다녀도 아이들마다 수업 시작과 끝나는 시간이 달라 하루에도 몇 번씩 학교에 드나들어야 했다. 학원이라도 보내려면 아이를 데려다 주고 수업 끝나기를 기다려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 하는 일들이 오로지 나의 몫이었기에 나는 그 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동행하지 않아도 아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당연히 아이들의 라이드 문제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쾌재를 부르기 충분한 일이다.

 

며칠 전에는 소규모의 학부모 회식이 있었는데 모두들 수수한 차림으로 집 앞 5분거리의 치킨 집으로 걸어 나왔다. 미국에 살 때는 친구들을 만나려면 운전해서도 30분 정도는 이동해야 만날 수 있었고, 동네 친구나 이웃과 식사하러 간다고 해도 식당에 도착하려면 최소 10분 정도는 운전대를 잡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는 음식점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다.

 

가끔은 남편과 단 둘이 테이블이 서너 개밖에 없는 집 앞 카페에서 30분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남편이 퇴근해 집에 도착할 무렵이면 지하철역에 마중을 나가기도 한다. 그때는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이어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빙판 길에 행여나 미끄러지지나 않을까 조심하느라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다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편의 실루엣이 보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남편의 팔짱을 끼고 집으로 돌아다가 포장마차에 들러 김이 솔솔 나는 어묵이라도 사 먹으면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땅도 녹아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집 앞에서 느끼는 이런 소소한 행복은 25년 만에 모국으로 돌아온 나에게 그 무엇보다 큰 위로와 응원이 되어주고 있다. 앞으로도 집 앞에서 만들어질 수많은 소소한 즐거움을 기대하며 오늘도 나는 옷깃을 여미며 현관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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