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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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20  

나만 멈춰있는 것만 같은 날, 그런데도 더욱 격렬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이 세상 천지에 나 혼자인 것만 같이 외로운 날, 누구나 위로 받고 싶은 그렇고 그런 날이 있다.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빨간 머리 앤(Anne with an "E")을 만나던 날이 나에게는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그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보기 시작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앤과 함께 울고 웃고 있었다.

 

나는 이름 끝에 "E"가 들어가는 앤(Anne)을 사랑한다. 어릴 적 애니메이션에서부터 동화,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소설, 넷플릭스 시리즈까지 단 한번도 앤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었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앤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낭만적이지만 가끔은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평범하지않은 추측 불가한 아이였다.

하지만 앤은 그저 애니메이션이나 소설 속 등장인물 이상으로 나에게 영향을 준 인물이다. 앤이 지닌 여러가지 모습들은 어릴 적 내 선망의 대상이었고 조금 부풀려 말하자면 나는 그녀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화를 싫어하고 평범함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보통 사람들 속에서 앤은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고 고군분투한다. 고아에 주근깨, 빨간 머리, 빼빼 마른 몸 때문에 콤플렉스에 휩싸이는 순간도 많지만 결국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앤의 치명적인 매력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거침없는 상상력에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콤플렉스나 현재 상황들을 상상으로 늘 멋지게 바꾸며 그것을 향해 성장하는 모습은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면서도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도망가지 않고 솔직하게 직면해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모습도 사랑스럽다. 그리고 자신이 의미 있게 생각하는 사람, 자연, 사물까지도 소중하게 가꾸는 모습을 보면 그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그래서 앤을 보고 있으면 기운이 난다. 어디선가 앤이 나에게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라고, 소중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정말 앤의 절반만큼이라도 닮을 수 있다면 나의 인생이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칼라풀해질 수 있을 것 같다.

 

혹시 넷플릭스 회원이라면 조금 울적하고 무기력한 날 빨간 머리 앤 시리즈를 볼 것을 권한다. 무한 긍정 앤의 에너지와 감탄이 절로 나는 아름다운 배경, 섬세한 고증, 소설 속 등장인물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듯한 배우들의 풍성한 연기력까지 나무랄 곳이 없을뿐더러 잃어버렸던 감성까지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최근 방영되었던 시즌 3을 보고 나서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꼭 가보고 싶어졌다. 앤이 살던 그린게이블스 초록 지붕 집과 앤이 이름 붙인 “빛나는 호수”에서 앤에게 고마움 전하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앤처럼 되고 싶었던 덕분에 나는 꽤나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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