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내 이름
04/23/18  

얼마  아버지 친구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분은 서양인들은 서로의 이름을잘 기억하며 부른다.” 그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말씀을 하셨다특히 서양 이름들은우리와 달리  복잡하고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이름들을 기억하고 부르는 것이 참놀랍다고 하셨다.

 

그러고보니 미국에서는 나이성별직업을 막론하고 이름을 부르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운일이었다할머니뻘 되는 이웃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들며 아침 인사를 하고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한 백화점 점원이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아니었다구매한 물품에 대한 불만이 있어 해당 기업의 고객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어도전화를 받은 직원은  이름부터 묻고 통화를 마칠 때까지 고객님”, “선생님이라는 호칭대신  이름을 불렀다아이들 학교에서 만난 학부모들도 따로 왕래하는 일이 없어도 통성명만큼은 잊지 않았고 격식이 있는 레스토랑 서버들은 손님을 맞을  제일 먼저 본인의 이름을 알렸다영어권 친구들은 나이 상관 없이 가까워지면 친구가 되었다는 의미로 존칭을생략하고 이름만 불러주기를 바랬고 상대방의 나이나 위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은아니지만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 보다 수평적이며 부드러운 관계가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있었다.

 

대학교 2학년  병원에서 같이 근무했던 상사나 동료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우리는 모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중에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60 한인 여성도 파트타임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녀를 엘리라고 불렀다한국 문화에 익숙한 나만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고 마땅한 호칭마저 찾지 못해  어정쩡하게 그녀를불렀던 것이 난감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미국  한인 이민 사회 안에서의 호칭 문화는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또한 중학교 때부터 미국에 살았지만 한국어권 대인관계와영어권 대인관계에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한국 문화에서 이름 굉장히 제한적인 관계 내에서만 허락된다우리는 이름 대신 언니,형님선생님사장님사모님과장님부장님실장님원장님아줌마아저씨자매님형제님선배님 혹은 00엄마, 00아빠처럼 위계질서직업역할이나 관계를 규정하는 표현 등을 사용한다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호칭을 정리하기 위해 관례처럼 나이를 묻지만 누구도먼저 이름 묻기를 주저한다마치 이름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서로의 호칭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러고보니 지난 여름부터 지금까지 은행이나 주민센터병원 등과 같이 본인 확인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고는 사적인 만남 속에서 아무도 나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매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들도 그저 서로를 406, 905 이런 식으로 기억하고  차례 어울려 식사도 하고 맥주도   했던 학부모 모임에서는 서로를 모두 00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분명 어릴  우리는 정답게 친구들의 이름을 불렀었다멀리서 친구가 “00!”하고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면 그렇게 반가울  없었고 친구가 매몰찬 얼굴로“000!”하고 성까지 붙여  이름  자를 부르면  친구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수있었다그런데 어째서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름은 점점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 더이상 이름을 묻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는 것일까?

 

서로를 부르는 호칭 속에 이름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몹시 씁쓸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다만 식물이나 물건에도 이름을 지어 불러주면 특별한 의미가 생기기 마련인데 이름 대신 그의 직업이나직책역할만으로  사람을 부르고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없다서로의 이름을 묻고 불러주는 일이 이렇게 특별한 일이  줄은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세상에 근사하고 좋은 존칭들이 너무 많지만 나는가끔 그저  이름으로 불려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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