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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02/17/20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그때 피아노 학원은 웬만하면 당연히 다녀야 하는 곳이어서 주변 친구들 중에도 피아노를 배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나 역시 특별한 열정이나 별다른 의지 없이 학교에 다니듯 매일같이 아파트 앞 상가 2층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체르니 100번까지는 진도 나가는 것도 욕심나고 꽤나 재미도 있었다. 그래서 매일 열심히 콩나물같은 음표를 그리며 숙제도 성실히 이행했었다.

 

그런데 체르니 30번 중반쯤 가니 피아노가 너무 싫어졌다. 특히 하농은 너무 무겁고 지루해서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거기다가 매일 엄마가 피아노 연습하라며 잔소리까지 해대니 피아노가 더 싫어졌다. 엄마는 내심 내가 체르니 40번까지는 끝내 주길 바라신 것 같지만 나는 바득바득 고집을 피워 결국 체르니 40번을 못 끝낸 채 피아노와 연을 끊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는 다시 제대로 건반을 두들겨 본 기억이 없다. 나는 무려 5-6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피아노를 쳤지만 몇 년의 공백 동안 손이 완전히 굳어버렸고 세월이 더 흘러버린 지금은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곡 한 곡이 없다. 그래서 이따금씩 딱 한 곡 정도는 외워서 연주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근사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나처럼 스트레스 받으며 피아노 치기보다는 음악을 온전히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처음부터 학원 보낼 때 두 가지를 신신당부 했다. 첫 번째는 아이들에게 피아노 숙제 내주지말 것! 매일 피아노 학원에서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텐데 숙제로 서로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진도, 빨리 나갈 필요 없다는 것! 진도 빨리 나간다고 피아노 더 잘 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다들 진도에 목숨을 거는지. 아무튼 두 가지로부터 자유로워져서인지 우리 아이들은 아직까지 한 번도 피아노 학원 가기 싫단 말을 해본 적이 없다. 혹시라도 그만 배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 두라고 말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씨알도 안 먹히는 분위기다.

 

나는 지금도 어디선가 “소녀의 기도”나 “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 퍼지면 귀가 쫑긋 해진다. 거의 외우다시피 했었는데 혹시라도 손가락이 기억해주려나. 가끔씩 그때 체르니 40번을 다 끝냈더라면 어땠을까…… 노래 한 곡 정도는 완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하며 이제는 굳어버려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애꿎은 손가락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느새 성장한 아이들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악보 없이 연주하는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아이들이 누르는 피아노 건반 위로 이슬처럼 맑은 소리방울들이 통통 튀어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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