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집착증
04/23/18  

예전부터 계속 느끼고 있었지만 한국에 살아보니 한국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위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수준이다. 사회적으로 영어에 대한 집착이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보니 남녀노소 영어에 목숨을 걸고 전국민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안달이 나있다. 마치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처럼 한치의 의심도 없이 영어만큼은 꼭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유아들에게 수십만 원에서부터 백만 원을 호가하는 영어 도서 전집을 사 주고 최소 백만 원, 강남에서는 2-3백만 원 한다는 영어 유치원에 등록하지 못해서 안달들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학원 등록 1순위가 단연 영어이고 학교는 물론 변두리 동네 학원에서도 원어민 교사를 내세워 학생들을 유치한다. 국내 영어 과외비나 해외 유학비나 큰 차이 없다며 방학 동안 해외 캠프를 보내기도하고 영어권 국가에 조기 유학 관심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멀쩡히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 회사원들도 영어 시험을 봐야하는데 심지어 전혀 영어와 상관없는 업무를 담당해도 예외가 없다. 친구의 남편은 한 기업의  IT 부서에서 근무하는데 회사에서 정기적으로 영어 시험을 보는 통에 주말에는 영어 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본인 업무에서 영어가 필요한 부분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영어 시험 성적이 직원 평가나 승진에 반영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몇 년 전에 종합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친구 역시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고백하며 여가 시간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해외 연수나 외국인 환자가 많아서 그러냐고 묻자 딱히 영어가 필요한 일은 없지만 그래도 영어만큼은 어느 정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세계화시대에 걸맞게 영어를 비롯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내가 미국에서 학교에 다닐 때도 외국어 수업은 필수였고 학생은 본인의 의지와 선택으로 원하는 외국어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영어는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니다. 필수이다 못해 영어를 잘 하고 영어 시험 점수가 높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다 보니 너 나 할 것 없이 영어 공부에 집착하는 것이다.


남녀노소가 영어에 빠지다 못해 도를 넘어서다 보니 결국은 모든 것이 돈이다. 뭐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한국에서 돈이 없으면 영어 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유아 영어 도서 전집, 영어 유치원, 영어로 수업한다는 사립학교, 영어 학원, 영어 캠프, 해외 유학 등 영어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꼭 해야 한다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비현실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부유한 사람들이 영어 공부에 더 유리할  수밖에 없는데 학교에서는 물론 각종 입사 시험, 선발 시험에서 영어가 필수 과목이며 영어 점수는 사람을 평가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니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구조이다.


솔직히 내가 한국에 와서 영어가 필요했던 순간은 손가락에 꼽힐 수준이다. 미국 대사관에 볼 일이 있었을 때와 한국에 사는 외국인 모임에 갔을 때 정도이다. 아직 우리집 아이들은 영어 대화가 편하다 보니 가족끼리 대화할 때는 영어를 섞어 쓰는 편인데 어쩌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이를 목격하면 꼭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아이들이 영어를 잘해서 좋겠다, 어느 영어 학원에 다니냐, 해외에 얼마나 살았냐 등등 영어 몇 마디 한 것만으로 단숨에 이목의 중심이 된다.


대한민국에서 실생활에서 영어를 매일 써야만 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모두가 영어와 관련된 직업을 가질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해외에 나가야 할 상황이 생기는 것도 외국인과 반드시 영어로 의사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영어가 필수가 되어버린 것일까?  영어를 하는 것만이  세계적인 국가로, 글로벌 시대에 인재로 발돋움하는 절대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갈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영어 배우기에만 집착하는 것이 우려스럽고 안타깝다. 그리고 이를 국가와 사회에서 거들며 조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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