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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어야 할까?
11/23/20  

죽음을 생각하면 살아 있다는 사실이 허무하고 언젠가 닥쳐올 그 순간이 두렵기 그지없다. 가끔 ‘죽어도 좋다’고 호기를 부리는 사람이 있지만 정말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죽음은 모든 종교의 출발점이다. 만약 인생에서 죽음이 없었다면 이 세상에 종교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보면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해명하고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이며 죽음은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모든 종교들이 내린 결론에 의하면 죽음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생명의 최후’가 아니라는 것이 있어 죽은 뒤에 심판을 받아 죄 지은 자는 지옥으로 가고 하느님을 믿은 사람은 천당으로 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영생으로 향하는 관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다른 종교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기실 인생의 모든 불행이 과욕과 집착에서 생기는 것이라 할 때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한결 소박하고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세를 위한 경쟁이나 용서할 수 없는 증오 따위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두려움이기보다는 인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고리로서, 구름이 흩어지는 것과 같다.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 흩어지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며 섭섭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옛 선사들은 죽음을 서서 고 앉아서 맞고 심지어는 걸어가거나 솔방울을 따다가 맞기도 했다. 이를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생사에 무애자재한 사람으로는 당나라 때의 포대 화상이 유명하다. 화상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는 <傳燈錄> 27권에 따르면 화상은 절강성 봉화현 출신으로 뚱뚱한 몸집에 얼굴은 찌그러지고 배가 축 늘어진 괴상한 모습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이름은 계차(契此)라 했으나 항상 지팡이 끝에 자루를 매달고 다녔으므로 일반에서는 포대화상이라 불렀다. 그런데 화상의 이 자루 속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마을로 탁발을 나갔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아무것이나 다 달라고 해서 그것을 얻으면 자루 속에 넣고 다녔다. 그러다가 누가 그것을 달라고 하면 화상은 언제든지 꺼내 주었다. 주는 대로 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잤다.



소유 관념에 찌든 사람들로서는 이런 행적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스님이 출현하면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면 스님은 거적때기를 깔아 놓고 자루 속의 물건을 쏟아 놓은 뒤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사람들이 대답이 없으면 스님은 이렇게 자답을 했다. “이것은 도솔천에서 가져온 것이고 이것은 내원궁에서 가져온 것이다.” 스님이 도솔천이나 내원궁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물건은 대개 마른 똥부스러기 같은 쓸모 없는 것이었다. 스님은 또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일기예보관이었다. 스님이 나막신을 신고 나온 날은 틀림없이 비가 왔다.



반대로 아무리 장마가 지는 날이라도 짚신을 신고 나오는 날에는 틀림없이 날이 개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님의 신발을 보고 날이 흐리거나 개일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화상은 이렇게 살다가 인연이 다하자 악림사(嶽林寺) 근처 어느 곳에서 가마니를 깔고 앉은 채 육신을 버렸다.



사람들은 포대 화상이 바로 미륵의 화신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중국의 절에서는 포대 화상의 모습을 그림이나 등상(等像)으로 만들어 놓고 이를 미륵보살이라고 존숭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생사를 초탈한 사람은 어떻게 살다가 죽는지를 보았다. 생사해탈을 한 대자유인의 모습은 이러하다. 그러나 이것은 포대 화상의 경우다. 문제는 내 앞에 죽음의 그림자가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정대선사>

출처: 불교신문(www.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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