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의 생활(마태 5,13-16)
02/08/21  

현대 물질문명은 인간 소외라는 슬픔을 우리 사회에 안겨 주었습니다. 인간이 지배하는 인간의 문화 사회가 아니라 과학이 지배하는 물질문명의 왕국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현 우리사회에는 물질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가치관, 공동체를 떠난 개인 본위의 사회관, 국적을 잃어버린 세계 시민적 자기 분열과 기만, 성적 무질서, 인격과 육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갖가지 퇴폐 행위에의 동경, 대마초 흡연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말세적 도피 풍조와 기풍 등이 뿌리 깊이 스며들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온 세계 사람들은 옳게 살아보자, 값있게 살아 보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보다 편하게, 보다 행복하게 살아볼 수 있을까 하는 차원 낮은 스펜서의 쾌락설에 만족한 나머지 영적인 것보다 감각적인 것을, 영원한 기쁨보다는 순간적인 쾌감을, 긍정적-건설적인 것보다는 부정적 파괴적인 것을, 근면 성실하게 얻는 것보다는 일시적인 빠른 수법에 의한 성공을 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 풍조 하에서는 옳은 것이 옳게 행세되기 어렵습니다.

중국 고사에 두 눈 가진 원숭이가 외눈 가진 원숭이 동네에서 병신 취급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같이 부지런한 사람은 우직한 사람이요, 눈치만 보는 사람은 영리한 사람, 조력자는 아부자요, 방관자는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는 기이한 현상을 나타냅니다.

 

원숭이 고사같이 선인, 위인, 또는 일꾼이 남의 시기와 질투 미움을 사서 따돌림을 받아 외로워지는 우리 사회가 될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면 존경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용납되지 않는 평범한 사회로의 복귀, 그것은 참으로 부럽고 아쉽기 한이 없는 일입니다. 토스트예프스키는 ‘이 세상이 나쁜 것은 내 죄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착한 일을 향하여 자기자신을 높이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충분한 선을 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증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더욱 좋게 이끌어가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십시오. 그들이 걸어온 길은 하나같이 괴로움의 길이며 자기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에 눈물이 쏟아지지 않고서는 진리의 골짜기를 보지 못할 것이며 당신의 마음이 찢어지도록 아픔을 겪지 않고서는 내면 생활을 밝히지 못할 것입니다.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기쁨을 모르고는 아직 인생의 지혜에 도달치 못한 것이며, 참된 인생을 생활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바쁩니다. 그러나 내일은 더 바쁠지 모릅니다. 거기에 대한 투쟁의 과정이 인생의 나그네 길입니다. 안락과 행복은 인생에서 모든 적극성을 빼앗아 갈 뿐입니다.

죄를 범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어서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무런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나에게 물질의 유혹이 뻗쳤을 때, 정욕을 불사르기 위한 불의의 찬스가 주어졌을 때, 다스리는 사람인양 착각하고 있었을 때, 쓰디쓴 충고를 해오는 귀찮은 존재가 나타났을 때, 선악의 편갈림을 해야 했을 때, 악에 가담함으로 생기게 되는 이득 때문에 미약한 선을 짓밟아 버리고 말았을 때 등등을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한 번 불의와 타협하면 두 번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듭니다. 그때에는 큰일입니다. 그래서 불의를 끊는 일엔 작은 일에라도 단호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한번이라도 타협하지 맙시다! 어떤 큰 이득이 온다 해도 그 단 한번이 우리들의 참된 신앙 생활을 좀먹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업신여기지 말고 영혼에 해를 가져오는 일엔 타협하지 맙시다. 아무도 세상에선 벗이 되어 주지않는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고 계속 십자가 아래 꿇어 엎드립시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참다운 통회로 흐느끼며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은 겉치레로 바치는 오랜 기도보다 나은 것입니다.

 

유진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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