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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의 스페인 여행기_4. 밤의 마드리드 속으로 도착하다
04/05/21  

정신없이 자다가 기내 안내 방송이 나와서 깼다. 15분 후에 착륙한다고 한다. 잠결에 들어 그 방송이 영어였는지 스페인어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밖은 벌써 깜깜해졌고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는데 저 멀리 밑에 아득하게 스페인이 보인다. 스페인의 야경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보여 나는 눈을 크게 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야경일 뿐인데도 아직도 옛날 17세기에 살고 있는 듯한 복고적인 정취가 물씬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야경은 검은 주단에 보석을 한 움큼씩 여기저기 뿌린 듯이, 아니면 보석으로 가득 장식한 왕관을 여기저기 놓은 듯이 찬란한 빛의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덧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R과 나는 달빛 아래 가까워 오는 스페인을 넋을 잃고 내려다 보았다. 검은 비단에 보석을 수놓은 듯한 그 신비한 광경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스페인의 거리는 모두 광장 중심으로 다이아몬드 형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에 밤에 공중에서 보면 그런 빛의 군집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7시 20분쯤 우리를 태우고 온 비행기가 마드리드-바라하스(Madrid-Barajas) 공항에 착륙했다. 우리는 리드미컬한 스페인어로 빠르게 말하는 스페인 승무원들의 배웅 속에 비행기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타고 공항 건물로 향했다. 거기까지는 여느 공항과 비슷한 풍경이라 마드리드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별로 안 나다가 셔틀버스 비상 출구 표지판에 스페인어가 먼저 크게 써 있고 그 밑에 영어가 작게 써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스페인이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1928년에 오픈한 마드리드-바라하스 공항은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이고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 사이의 결정적 연결점이 되는 공항이라고 하는데 의외로 자그마하고 소박한 규모였다. 모든 안내가 스페인어로 되어 있었지만 로스엔젤레스에서 온 우리 눈에는 그것이 익숙하고 정겹게까지 느껴졌으니 참 재미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공항은 한산해서 이탈리아에 도착해 소매치기 때문에 긴장했던 그런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우리는 마음 편히 느긋하게 수화물 컨베이어에 가서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다.

 

  공항 밖의 날씨는 화씨 46도, 섭씨로는 7.8 도 정도로 굉장히 추운 날씨였다. 마드리드는 서유럽의 지형 중에 고지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겨울에는 상당히 춥다고 들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추운 기온보다는 매우 건조한 느낌이 피부에 먼저 와 닿았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런던에서 날아온 까닭도 있겠지만, 일년 내내 건조한 로스엔젤레스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그 건조함이 익숙하게 느껴진 것 같다. 실제로 마드리드는 유럽의 수도 중에서 가장 건조한 기후를 가진 도시라고 한다.

 

  우리는 예약된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러 갔다. 공항 밖 택시 라인에 줄을 서면 교통 정리하는 아줌마가 차례대로 손님을 태운다. 하얀 택시들이 두 줄로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니 나이 지긋한 초로의 운전기사 아저씨가 웃으며 맞아 주었다. 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앉아 있었지만 키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어는 하나도 못 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정확하게 하기 위해 호텔 주소를 보여 주었다. 스페인 운전 기사는 ‘여기가 어디지?’ 하더니 내비게이션 대신 두툼하고 너덜너덜한 지도책을 불쑥 꺼내 들어서 우리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거의 이삼십 년 전에 사라져버린 것 같은 지도책이라니! 할 말을 잃은 우리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그가 지도 책에서 호텔 주소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뒤적거리더니 찾았는지 ‘Vamonos! (갑시다!)’라 외치며 드디어 떠난다. 밤의 마드리드는 깜깜하고 도로는 한산했으며 가로등은 붉은 빛이었다. 시각적으로도 건조함이 느껴진다. 호텔까지는 35유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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