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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것 하나에도 손길을 (루가 10,25-37 (다))
04/12/21  

사랑이란 자기의 최대의 관심을 상대방에게 기울이고,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미움도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므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반대는 오히려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상대방을 위해 헌신하는 데 쏟고, 미움은 나의 관심을 상대방을 비판하는 데 쏟습니다. 그러나 무관심은 전혀 관심 밖에 두고 남남으로 남아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며 어떻게 표현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이론과 주장이 있겠지만, 성서적으로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나 참 진리입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는 것입니다.

 

즉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에 죽고 상대방 안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에 죽고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짓입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그 행위에 있어서 그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소중히 할 뿐 아니라, 자기의 소유 전부를 바치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누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떠한 것이든 그 사랑하는 대상을 괴롭히거나 또 자신의 사랑을 방해할 때는 생명을 걸고 그것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류가 모두 한 아버지(하느님)의 자녀들이므로 한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애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올바른 가치판단을 가지는데 있다고 봅니다. 고상한 것과 지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보다 높은 선에 이르기 위해, 보다 낮은 차원의 것을 포기할 줄 아는 것이 참다운 자기애가 아닐까 합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안락을 포기할 줄 아는 것, 즉 행복하고 건전하며 품위 있는 미래를 위해 젊은 혈기를 억제하고 인격을 높이는 교양을 쌓는 일 등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다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으로 바꾸겠느냐?”(마태 16,26). 자유를 방종과 혼동하고, 동물과 다를 바 없이 관능적 쾌락에 몰두한다는 것은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대는 얼마나 이런 사람들이 많은지..

그리고 벗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또 이웃에 대한 사랑의 미담도 수없이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려주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인도의 마더 데레사의 경우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4)는 이 말씀은 인류의 정신사에 결정적인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것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실천될 때 인류사회에서는 미움이라는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미움보다 강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전세계를 차지하셨습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내주고, 그 사랑하는 대상을 모두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조국을 사랑한다면 조국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치고, 조국은 비로소 그때 나의 것이 됩니다. 원수에 대해서도 이 법칙은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면 원수는 마침내 우리와 한 형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미워한다면, 사랑의 경우와는 반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사랑은 미움을 몰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김몽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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