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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아는 것이 천국이다(마태 21, 28-32(가))
06/28/21  

신앙의 열매를 세속의 눈으로만 본다면 참으로 '요지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을 형편없이 살았던 자들이 하느님의 칭찬을 받아 천당에 일찍 들어가는가 하면 열심하고 경건하게 살았던 자들은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받아 천당문 밖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 말씀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1). 이게 얼마나 큰 모순이요 충격적인 발언입니까?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도대체 창녀들만 못하며 도둑이나 세리만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오늘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겨 들어야 합니다.

 

어떤 부부가 서로 다툰 뒤에 저를 찾아와서 상담한 일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얘기를 들으면 여자가 나쁩니다. 남자 자신에겐 흠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얘길 들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가 나빠도 보통 나쁜 것이 아닙니다. 여자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에겐 흠이나 잘못이 없는데 왜 늘 서로 싸워야 하는 모순 속에서 몸부림쳐야 하느냐?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남의 잘못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행의 원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왜 유대교에서 존경받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창녀나 도둑만도 못하다는 꾸지람을 하시느냐? 아주 뻔한 것입니다. 도둑이나 창녀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께 매달릴 줄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대사제와 원로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천당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남은 잘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불행도 없습니다. 성서에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자기 죄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천당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요, 자기 죄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여전히 천당에서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또는 얼마나 큰 죄를 졌느냐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정하고 고백하면 됩니다.

 

십자가 옆의 강도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매달려 자비를 빌었을 때 그는 이미 낙원을 약속 받았습니다(루가 23,39~43참조). 도둑이었던 세리도 자신이 부정직하고 욕심 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했을 때 그는 이미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은 자신의 공로는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믿음이 없고 사랑이 부족하며 용서가 없었고 그리고 이웃을 너무도 무시했던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불행했습니다(루가 18,9 ~14참조).

 

옛날 어떤 임금이 교도소를 순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죄수들이 임금에게 자신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들어왔다고 하소연을 하더랍니다. 그때 임금은 그러냐고 하면서 그들을 동정해 주었는데 마지막 한 사람만은 아무 말도 못하고 훌쩍 훌쩍 울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사연을 들어 보니 자기는 죄가 많아서 임금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처지라고 한탄하더랍니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그랬답니다. 이곳은 죄 없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인데 왜 죄인을 이곳에 들여보냈느냐고. 그래서 그 죄인은 그 날로 석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 흔한 말로 '주제 파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주제 파악이 안되면 아주 피곤합니다. 하느님은 무슨 잘못이나 다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죄만은 용서가 안됩니다. 용서를 하시고 싶어도 계속 감추고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창녀만도 못하고 도둑만도 못한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어찌보면 어리석은 삶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말씀은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는 거짓이 없습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기에 앞서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 보도록 합시다. 이것이 잘 살고 잘 믿는 길입니다.

 

강길웅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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