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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의 피렌체 여행기_ 5. 산토스피리토 광장(Piazza Santo Spirito)으로
07/23/18  

R은 여전히 입술을 꽉 다물고 앞만 노려 보면서 걸어 가고 있었다. 말을 걸면 그대로 굉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갈 것 같은 발사 직전의 미사일 같은 모습이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자기가 잘못해 놓고 왜 저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지? 나도 할 말이 많지만 아무 말 않고 참고 있는데 시종일관 뿔을 내고 있는 그 모습을 보니 슬며시 화가 났다. 그러나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기로 했다. 아이는 엄마가 야단치고 잔소리 할까 봐 필사적으로 방패를 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찾은 콜 센터는 벽에 조그맣게 구멍을 낸 듯한 말 그대로 구멍가게였다. 중동 이민자로 보이는 젊은이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내부에는 공중전화 부스 같은 것이 세 개 설치 되어 있었고 팩스기기, 복사기기 같은 것들이 여기 저기 보였다. 우리가 들어 서자 주인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던 서너 명의 중동계 남성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 보았다. 우리는 영어로 미국에 국제전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인은 영어를 못하지만 눈치로 알아 들은 것 같았다. 이탈리아 어로 부스 중 하나에 들어가서 전화를 걸라고 한다. 우리 역시 눈치로 알아 듣고 시키는 대로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옛날에 없어진 다이얼식 전화가 한 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전화를 앞에 놓고 R이 당황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엄마, 카드 번호가 있어야 하잖아. 카드 회사 전화도 몰라!” 너무 놀라서 그때까지 그 생각도 미처 못 한 것 같았다. 나는 내 핸드 폰을 척 내 놓으면서 자신 있게 말했다. “엄마가 혹시 이런 일이 일어 날까 봐 모두 사진을 찍어 놓았지!” 정말 내 핸드폰에는 R의 패스포트, 미국 운전면허증, 크레디트 카드, 은행카드 모두의 앞, 뒷면을 찍은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R이 처음 런던으로 떠날 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찍어 놓은 것이었다. 만일의 경우가 사실이 되고 보니 그것이 결정적인 기록이었다. 혹시라도 그 핸드폰을 잃어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이 나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은 손톱만큼도 나지 않았다.

 

R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미국 크레디트회사와 은행에 전화를 걸어 도난 신고를 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크레디트카드와 은행카드는 즉시 사용 중지가 걸렸고, 새 카드는 3일 안에 런던에 있는 해리의 주소로 우송하기로 했다. 우리는 6일 후에 런던으로 다시 돌아가니까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무사히 일을 해결한 우리는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들여다 보고 있는 중동 젊은이들 사이에서 주인이 달라는 대로 돈을 지불하고 (시세가 얼마인지도 모를 뿐더러  흥정할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었으므로) 구멍가게를 나왔다.

 

밖은 이미 밤이 내려 깜깜했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미로 같은 피렌체의 골목 어딘가에 서 있었다.  “배 고프지? 어디 가서 빨리 저녁을 먹자.” 밥을 먹자는 엄마의 말에 갑자기 R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 고마워! 엄마, 미안해!” 아이는 그때까지의 긴장이 다 풀리고 비로소 자기의 태도가 어처구니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흐느껴 울었다. “괜찮아. 다 해결 됐으니까 이제 됐다.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지. 이제부턴 엄마 말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고 말이야.” 나는 우는 아이를 안아 주면서 토닥토닥 달랬다. 그런데 나도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기대에 부풀어 날아 온 피렌체에서 도착하자 마자 당한 사건이 너무 황당했고, 집으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진 이국의 도시 골목 한 귀퉁이에서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와 그렇게 끌어 안고 서 있는 것이 왠지 너무나 서러워졌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피렌체의 밤 하늘 아래 골목에 서서 같이 울었다.

 

그때 어디선가 검은 털을 가진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개는 어슬렁거리면서 다가 와 우리를 빤히 보다가 신발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우리는 울다가 개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갑자기 깔깔 웃으니까 이탈리아 개는 놀라서 도망쳐 버렸다. 우리는 계속 소리내 웃으면서 골목을 빠져 나왔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 조그만 광장이 나오면서 우아한 로마네스크식 성당 건물이 나타났다. 구글맵을 찾아 보니 ‘성령의 광 (Piazza Santo Spirito)’ 이었다. 산토스피리토 성당의 흰 벽을 밝게 비추며 광장에는 불이 환했고 성당 맞은 편으로 야외에 테이블을 놓은 레스토랑들이 줄 지어 있었다. 우리는 뜨라또리아 보르고 안티고 (Trattoria Borgo Antigo)라는 레스토랑으로 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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