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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은 죽음 아닌 완전한 자기해방
07/12/21  

열반이란 말을 불교에서 죽음을 대신해 사용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이는 불교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열반이 죽음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어도, 흔히 열반이라고 하면 죽음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열반이란 말에는 죽음이란 소극적인 뜻만이 아닌 너무나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이는 불교를 표면적인 의미만이 아닌, 조금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열반의 자리는 청정무구의 자리입니다. 열반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의 알맹이로 변이된 자리이며, 몸뚱이에서 일어나는 욕정의 불길이 청정한 향기로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열반을 증득(證得)한다는 것은 부처가 깨달음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며, 부처의 진리 행업을 실천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부처의 자리가 열반 구경지의 자리이므로 여기에서는 번뇌의 티가 없고 욕심의 흔적이 없습니다. 오직 바른법에 귀의하여 바른 행을 닦아가는 최상승(最上乘)의 과행을 저어 가는 길이 바로 열반의 길입니다.

 

열반을 증득하는 길은 끊임 없는 고난의 길이며, 수행의 길입니다.수행의 길이란 것은 영원한 진리의 세계 속에 자아를 귀의시키는 것입니다.

 

진리 속의 자아는 무아(無我)의 나, 즉 나 없는 ‘나’입니다.‘나’를 이름 짓지 않은 ‘나’로서 행함이 ‘참나’의 행업이므로 고난의 길입니다.그러므로 증득하기 힘든 길입니다.자기를 바치지 않고, 번뇌를 버리지 않고, 참회하지 않고,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참다운 진리인 부처의 고향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육신의 고난과 정신적인 고투로 이룩한 깨달음을 통해 자기해방의 길을 얻었습니다.자기의 해방은 ‘참나’를 이룩하는 열반의 광명입니다.

 

우리들 인간이 갖고 있는 육안은 흐리고 어둡지만 열반의 눈은 광명의 눈입니다. 이것은 걸림 없이 투과하는 직사의 빛입니다. 굴곡 없이 반사하고, 막힘 없이 관조하는 지혜의 눈이 바로 열반의 빛입니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여래가 청정한 계율을 가지는 이는 열반을 얻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지금 깨끗한 계율을 닦는 일로 열반을 얻으리라”하였습니다. 또한 “세간의 계율은 청정하다고 이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세간의 계율은 있음을 위하는 연고이며, 성품이 결정되지 못한 연고이며, 끝까지 이르지 못한 연고이며, 모든 중생을 널리 위하지 못하는 연고이니,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하다 이름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이르는 길은 계행의 청정에 있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계행이란 속제의 생활에서 지키는 계행이 아니라 진제의 생활에서 지키는 계행입니다. 열반의 의미가 죽음의 의미가 아닌 것과 같이 생명을 바쳐 증득한 것이므로, 종교 생활의 최후 목적이 바로 열반인 것입니다.

 

청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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