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여행
홈으로 그림여행
저승사자의 응시 (Spirit of the Dead Watching c. 1892)
07/30/18  

고갱 (Paul Gauguin  1848 – 1903)

(캔버스에 유채  116.05 cm x 134.62 cm   버팔로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무더위가 극에 달했던 여름 어느 날, 시내에 볼 일이 있어 외출을 했다가 마지막으로 은행에 들렀다. 은행 건물 앞에는 깨끗하게 화단이 가꾸어져 있었고 시원하게 그늘져 있어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여기 저기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눈에 가득 들어오는 뜻밖의 정경에 발을 멈췄다.

 

나이는 스물도 채 안 되어 보이는데 키가 180 cm는 족히 되어 보이고 체격은 아마존 여 전사처럼 건장한 흑인 아가씨 한 명이 화단에 비스듬히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검은 피부는 흑진주처럼 빛났고, 두툼한 입술과 부리부리한 눈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그 커다란 몸을 쭉 펴고 누워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상관없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여름 오후의 그늘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그 당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고갱의 그림 ‘저승사자의 응시’를 머리에 떠 올렸다. 사십 대에 인생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오직 그림을 그리러 타히티로 떠났던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은 그곳에서 지상의 낙원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남태평양 섬나라의 풍물과 그 곳의 사람들을 그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저승사자의 응시’라는 다소 무서운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고갱이 자신의 타히티 현지처 테후라를 모델로 그린 그림이다. 테후라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그림 속에서 나신으로 침상에 엎드린 채 겁에 질려 간신히 얼굴을 돌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침상은 보라색과 핑크, 남색과 오렌지 색 등 강렬한 원색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뭔가 으시시하며 석연치 않다.

 

왜 고갱이 누드를 공포라는 설정 하에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와 있다.  그 중에 설득력 있게 받아 들여진 것은 이 그림이 프랑스령 식민지의 원주민에 대한 제국주의적 압제의 시각을 나타냈다는 설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격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는 설이다. 타히티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여전히 유럽에 그림을 팔아야 했던 고갱이 보수적인 관객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만한 과격한 누드를 포장하기 위해 공포라는 주제를 첨가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고갱의 그림을 떠 올리며 화단에 누운 흑인 아가씨를 바라보는 동안 고갱이 그 곳에 나타나 그 아가씨를 보았다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 지를 상상해 보았다. 그런데 고갱은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충동없이 그저 그녀를 바라 보았을 것 같다.  여름 오후 화단 속 그녀는 그림이라는 해석이 전혀 필요치 않을 만큼 스스로 그저 풍요롭고 서정적인 한 폭의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김 동백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