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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가 아프지 않으랴
10/25/21  

요즘 내 삶의 화두는 온통 자비심이다. 자비로 뭇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는 수행과 깨달음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그런 수행과 깨달음은 진정한 수행과 깨달음일까? 그것은 한낱 사치스런 관념과 수식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비는 당장의 마음이고 당장의 실천이기 때문에 과거에도 지금에도 미래에도 늘 생동하는 평등의 눈길이요, 구제의 손길이요, 연민의 가슴이다.

 

내게 처음 자비심이 무엇인가 절절하게 온몸으로 가르쳐 준 분은 우리 할머니이시다.

내가 유년기를 보낸 가난한 시골의 우리 마을은, 6·70년대 가난한 시골 마을이 그렇듯이, 하루 걸러 남루한 사람들이 어김없이 구걸하러 왔다. 가난한 살림에도 우리 집은 나름 적선의 원칙이 있었는데, 탁발 온 스님에게는 쌀 한 그릇, 걸인에게는 보리쌀 한 접시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걸인에게 적선하면서도 꼭 한마디씩 위로와 축원을 해주셨다.

“아이구! 어쨌든지 굶지 말고 아프지 말고 몸 간수 잘 하시우!” 그럴 때마다 미안해하는 수줍은 몸짓과 더불어 눈시울이 붉어졌던 걸인들의 모습들이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또 나의 할머니는 혹여 걸인들이 끼니를 채우지 못한 것을 알면 없는 반찬과 보리쌀 많이 섞인 밥일망정 밥상을 정성스레 닦아 차려주셨다. 하지만 어린 나는 걸인이 먹는 밥상이 늘 마음에 걸렸다. 아니, 저들이 먹는 밥그릇과 수저로 내가 밥을 먹을 수도 있는데……

그래서 어느 날 할머니에게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할머니! 보리쌀을 주는 것은 좋은데 거지들에게 밥은 안 차려 주었으면 좋겠어요.”

할머니는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애야, 먹는 입은 다 똑같은 거란다.”  

 

나는 그때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달은 것 같다. ‘차이가 있지만 차별해서는 안 되는’,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절대적 빈곤에 내몰린 걸인에게도 신체적 절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도, 예의와 인정을 베풀었던 할머니에게서 나는 별다른 이론적 학습 없이 겸손과 평등과 자비를 저절로 체득한 것 같다. 내가 기억하기로 나의 할머니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신 분이었다.

 

“모든 생명은 채찍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임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나에게 견주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는 법구경의 간명한 말씀에는 평화와 평등, 자유를 염원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자비심이 배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쟁을 반대했고, 계급의 차별을 원천적으로 부정했고,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중생과 동행한 당신의 삶에 굵직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부처님은 똥을 푸는 직업을 가진 수드라 신분의 니디에게는 “너는 세상을 가장 깨끗하게 하는 사람이다. 자,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내 손을 잡아라.”라고 자비의 언행을, 계급이 높다고 교만한 바라문에게는 “악행을 하면 누구나 나쁜 과보를 받고 보시하고 선행하면 누구나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 나는 출생을 묻지 않는다. 다만 행위를 묻는다.”라고 하며 알량한 개념에 물든 이에게 등을 후려치는 죽비소리의 말씀을 내리셨다. 일상의 통념적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들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새로운 방식의 자비 복권을 제시해주셨다. 이렇게 부처님의 자비심은 어느 개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을 넘어 시대와 역사의 광장에서 정의와 공정의 외침으로 다가온다.

 

왜 자비심인가? 그것은 생명의 질서이고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비심은 누구도 소외받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씨앗이요,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자비심을 나눌 때 그 순간 우리 마음은 자비심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결국 자비심의 최대 수혜자는 자기 자신이 된다.

 

자비심! 그것은 더불어 평등하고 평화롭고 환희롭게 살아가는 깊은 지혜이며 실천이다.

오로지 이 길뿐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아프지 않겠는가?

 

법인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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