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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나’ 버리고 본래 부처를 보라
11/22/21  

 

인연따라 생기고 인연따라 사라지니 세상엔 고정불변한 영원한 실체는 없습니다. 허공은 허공일 뿐 어둠이 오면 어둡고 밝음이 오면 밝아집니다. 자성자리도 그러합니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법을 바로 보는 안목을 가지자’입니다. 법을 바로 보는 안목을 부처님 말씀에서 찾는다면 정견(正見)이 될 것입니다. 바로 본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깁니다. 무엇을 바로 봐야 할까요? 바로 보는 그 의지처는 또 어디일까요?

 

부처님은 삼라만상, 일체현상이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변해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상(無常)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못하다는 뜻이지요. 제법(諸法)은 연생연멸(緣生緣滅)이라.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 자기라는 고정불변하고 영원한 실체 또한 없습니다. 이것을 무아(無我)라고 합니다. 이러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이치를 알면 바로 안락을 얻게 됩니다.

 

역대 조사와 선사들은 한 소식 깨치고 보니 우리 모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불성을 갖춘 부처였다고 말합니다. ‘본래부처’라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는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잡니다. 이런 이치는 부처님도 똑 같습니다. 그런데 왜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요? 효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일체 중생 모두를 당신과 같은 부처로 봅니다. 불성으로 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중생들의 마음속에는 불성 대신 중생심이라는 아주 ‘잘난 놈’이 하나 들어앉아 주인 노릇을 합니다. 이 잘난 놈 때문에 나를 괴롭히고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바로 내가 아상도 만들고, 인상도 만들고, 중생상도 만들고, 수자상도 만들고, 탐·진·치도 만들고, 잘하는 것도 만들고, 어기는 것도 만들고, 오만심도 만들고, 별의 별 것을 다 만듭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들어 놓고 세월이 지나다 보니까 바로 그 놈이 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마음자리는 허공과 같습니다. 허공은 밤이 오면 밤과 더불어서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태양이 들어오면 함께 밝아집니다. 허공 자체는 어두움도 아니고 밝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허공은 우리의 본래 본성, 불성입니다. 허공은 오염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성 자리는 ‘본래 청정하다’, ‘본래 부처’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견만 갖추면 되는 것일까요?

 

불교는 종교입니다. 신앙 또한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믿음, 또는 신심이 되겠지요.

『화엄경』은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遍正覺)’이라.

내가 처음 부처가 되겠다고 한 생각 일으키는 바로 그 순간, 정각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중생심이라는 잘난 놈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 곳에서 자성이 바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바로 정견과 믿음을 갖게 되면 이제는 발심을 하게 됩니다. 발심 단계에 들어가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이 세상은 생명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모두가 인연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진리를 확신하기 때문이지요. 그 단계가 되면 중생심으로 살아 온 지난날에 대해 분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입니다.

 

발심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원력입니다. 원력이라고 해서 크고 웅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하루 거짓말 하지 않겠다. 화를 내지 않겠다.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겠다. 이렇게 매일 원력을 세워 지켜보십시오. 비록 일일원력이 미약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또한 힘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힘이 커지면 세세생생의 원을 세우게 됩니다.

그것은 대자비의 원력입니다. 부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남을 위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봉사의 근본입니다.

생활도 수행도 공부도 보시도 처처에서 ‘답게’ 잘 하시기 바랍니다.

 

-설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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