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마르 10,46-52 (나))
10/24/22  

며칠 전에 한 소경을 만났는데, 그는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 잘못이나 부모의 잘못도 없이 선천적인 장애를 입는 경우를 운명 또는 팔자라고 부른다.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와 혼담이 있었을 때 시집 안 간다고 도망을 갔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 집 굴뚝 모퉁이에 가서 숨었다. 그 때문에 속으로는 시집가고 싶으면서도 겉으로는 내숭 떤다고 흉을 잡혔다고 한다. 그때 만일 나의 어머니가 멀리 도망갔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게 아닌가?

나는 내가 원해서 김 가가 된 것이 아니다. 나는 대머리가 된 것이 고민거리이다. 몇 개 안 되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면 작은 거울과 빛을 꺼내어 빗는데, 사람들은 빗을 게 뭐 있느냐고 비웃는다. 이것이 매우 싫은데, 내가 원해서 대머리가 된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일전에 성당에 십자가를 기증한 어느 여신자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급사했는데, 슬퍼하는 미망인에게 뭐라고 위로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나환자들의 미감아들을 보면 운명의 장난이 기구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천진난만하고 예쁜 천사처럼 생긴 그들이 나환자 부모들 때문에 사회로부터 천시를 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불쌍하기 짝이 없다. 운명의 장난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는데, 누가 그런 운명의 장난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흔히는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는 한편, 인간에게 그 운명을 초월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그 능력은 무엇이냐? 바로 자유이다. 자유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창조주의 선물이요 특권이다. 같은 불행을 당해도 그것을 극복하면 행복이 되고, 극복을 못하면 불행이 된다. 그 이유는 자유 때문이다.

이사악의 쌍둥이 아들 에사오와 야곱의 경우를 보자. 똑같은 처지에서 에사오는 저주받은 민족이 되고 야곱은 축복 받은 민족이 되지 않았는가? 이것이 모두 자유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바다 면보다 땅이 낮아서 풍차를 이용하여 부강한 농업국을 이룩했고, 스위스는 산악투성이의 땅을 개발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국 또는 정밀 시계 산업국을 이룩했다. 이것도 역시 자유의지로 운명을 극복한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는 아름다운 강산, 특히 맑은 물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산이 훼손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헬렌 켈러 여사는 강한 자유 의지로 자기의 운명을 극복한 가장 훌륭한 예이다. 그녀는 소경이었고 귀머거리였고 벙어리였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피눈물나는 노력을 한 끝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선 사업가가 되지 않았는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전원 교향악>에 나오는 소녀가 눈을 뜬 후에 본 것은 질투와 시기와 증오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반면에 <요한 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이 예수의 능력으로 눈을 뜬 후에 본 것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투와 시기와 증오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경은 나중에 주님을 발견했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차이점은 신앙이었다. 신앙은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 성당의 신자 한 사람이 자동차 사고를 내서 어린이를 다치게 했다. 나도 근처 병원에 입원한 그 어린이를 찾아가서 문병도 하고 기도도 해주었는데, 개신교 신자인 그의 부모는 이것이 다 주님의 뜻이고 그 동안 자기들이 신앙 생활을 소홀히 한 데 대한 하느님의 경고라고 말했다. 이런 것이 바로 운명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태도인 것이다.

로마의 시인 세네카는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람 자신이 운명을 무겁게 짊어지기도 하고 가볍게 처리해 버리기도 한다. 어떤 역경이라도 이성으로 과감하게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위대하다.”고 하였다.

김창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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