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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 속의 청년 (Young Man Among Roses c. 1587)
11/05/18  

니콜라스 힐리아드 (Nicholas Hilliard 1547 – 1619)

(모조 양피지에 수채화. 미니어쳐 세밀화. 런던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뮤지엄)

 

런던 사우스 켄싱턴에 위치한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은 영국, 아니 세계 최대의 디자인 장식미술 박물관이다. 1852년에 설립되었고 영구 소장품은 227만 점에 이른다. 박물관 건물은 12.5 에이커에 달하며 전시관 수는 145개, 소장품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를 아울러 유럽,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전 지역에서 수집한 조각, 그림, 도자기, 의상, 보석, 가구, 판화, 유리, 금은 제품, 사진 등 인류의 창조력이 생산해 낸 모든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렇게 광대한 박물관의 셀 수 없이 많은 전시품들 중에서 유독 마음을 끌었던 것이 이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작디 작은 세밀화 한 점이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얼굴을 바짝 대고 들여다 보아야 겨우 디테일이 보이는 이 미니 그림은 그 작은 화면 속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이야기 뒤에는 또 끝없는 상징 기호가 숨겨져 있어 마치 아주 작은 창으로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내다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 작은 창 너머 세상은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 엘리자베스 1세의 세계이다. 절대 군주의 권력을 지니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신화를 일구어 낸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는 또한 문화가 융숭하게 피어난 황금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유행했던 풍습 중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표로 세밀화를 그려 건네는 관습이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그려 상대방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암호에 가까운 문구를 함께 새긴 다음 건네주면, 받은 사람은 목걸이에 넣어 간직하거나 깊은 곳에 넣어 놓고 은밀하게 들여다 보곤 했다고 한다.

 

튜더 왕조의 상징인 장미꽃 속에 서서 검은 망토와 흰 타이츠를 입고 나무에 기대 선 채 오른쪽 손을 가슴에 대고 있는 이 미남 청년은 엘리자베스 1 세의 총애를 받았던 로버트 대버러 에섹스 2세 백작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시 백작의 나이는 17세 가량이었고 여왕은 육십이 넘었었다고 하니 그 나이 차를 볼 때 순수하게 플라토닉한 사랑이었다고 보는데 이 세밀화를 여왕에게 바치며 애정 외에도 충성을 맹세했다고 짐작 된다. 그러나 에섹스 2세 백작은 1601년에 반란 역적 죄를 짓고 그 일당과 함께 목이 잘리는 사형을 받았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에 나온 수많은 세밀화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이 신비한 그림은 그 비극적인 뒷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마치 머나먼 밤 하늘에 빛나는 한 점 작은 별처럼 한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김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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