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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의 피렌체 여행기_23. You Never Know
11/26/18  

콰트로 레오니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약속대로 두 시간 내에 일어났을 때쯤에는 이미 손님이 꽉 차서 예약 없이 오는 사람은 모두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석양이 내린 파세라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했다. 여기 저기 놓여진 벤치에 앉아 맥주나 아페리티프를 마시거나, 바로 앞 가게에서 젤라토를 사 먹으며 즐겁게 담소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이 참 보기 좋았다. 광장으로 들어오는 골목에는 우피찌미술관 그림에서 본 아기천사 뿌띠(Putti) 같은 아기들이 나타났다. 금발 곱슬머리에 터질 듯 통통한 사과같이 빨간 뺨, 커다랗고 동그란 눈들이 그림에서 그대로 걸어 나온 것 같아 너무 귀여웠다.

 

구글맵을 보면서 숙소로 걸어 왔다. 5분 정도 거리였다. 내일은 샌 로렌조 성당과 산타 크로체 성당을 보러 갈 예정이다. 들어 와서 잠시 쉬다가 아무래도 물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찾으러 다시 나갔다. 폰테 베키오를 건너서 중심가로 들어가 찾아 보기로 했다.

 

폰테 베키오에는 아르노 강으로부터 저녁 강물 냄새가 은은하게 올라 오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조각상은 유명한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 흉상인데 작은 분수이기도 하다. 그 주위를 둘러싼 철책에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연인들이 걸어 놓은 자물통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러브 락(Love Lock)이라고도 부르는 자물통 주위에는 서로 어깨를 감싼 연인들이 다리에 기대어 석양 속에 강물을 바라보고, 길거리 악사들은 저녁 공연 준비에 한창이었다.

 

폰테 베키오를 건너면 어느 길로 가던 쭉 가다가 두오모 대성당을 만나게 되어 있고 두오모가 있는 광장에서 모든 것이 방사선으로 퍼져 나가게 되어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이탈리아 명품 매장들을 지나갔다.  비아 데 토르나부오니 길(Via de’Tornabuoni).  중세 건물 속에 들어있는 구찌, 프라다, 미유 미유, 셀린, 베르사체 등 초 현대판 명품 매장들은 모두 다 규모가 엄청나서 명품 쇼핑을 좋아하는 관광객들이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구찌 매장을 지나면서 문득 소매치기 당한 R에게 지갑을 하나 사 주고 싶어졌다. “우리 여기 들어 가서 네 지갑 하나 사자.” 구찌 매장 문 앞에서 말했더니 R이 손을 내젓는다. “엄마, 아니야! 오늘이 어머니 날인데 그러면 내가 너무 미안하지!” 얼굴까지 빨개지며 극구 사양하는 R을 끌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반색을 하며 맞이하는 매장 직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예쁜 지갑을 여러 개 보았지만 R은 끝까지 사지 않겠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그냥 나왔다.

 

슈퍼마켓을 찾지 못해서 그냥 눈에 띄는 편의점에서 물을 두 병 샀다. 어둠이 내린 거리를 천천히 걸어 오는데 중세 건물을 달빛처럼 조명으로 밝히고 있는 이 피렌체가 마치 유니버설 스튜디오나 할리우드 영화 세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서 시간이 멈춘 듯 건물들이나 그 안에 전시된 미술품들은 그대로인데 세월은 흘러서 500년 후의 인간들이 이 중세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중세에 대한 기억이 현실로 발현한 듯한 이 꿈같은 도시는 그래서 더 아름답고 환상적인지도 몰랐다.

 

숙소로 돌아 왔다. 샤워를 하고 R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보는 동안 나는 침대 앞 붙박이 장에 안쪽으로 공간을 만들어 넣은 책상에 앉아 영수증을 정리하고 이메일을 체크했다. 핸드폰을 들고 무심코 확 일어났는데 눈 앞에 별이 번쩍했다. “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난생 처음 겪는 통증이었다. 붙박이 벽장 문고리 쇠에 이마를 찍힌 것이다. “엄마!” R도 비명을 질렀다. 나는 눈도 못 뜨고 이마를 감싼 채 신음소리를 냈다. “엄마, 혹 났어! 피도 나!” R이 울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겨우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았다. 정말 그새 메추리 알만한 혹이 솟아 올랐고 눈썹 바로 위로 죽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병원에 가서 꿰매야 하나 하고 자세히 보니 살이 갈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깨끗이 씻고 비상으로 가져 간 네오스포린 연고를 발랐다. 반창고까지 붙인 다음에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침대에 누워 R에게 여권과 현금이 어디 있는지 다 가르쳐 주고 만약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할지를 일러 주었다. 너무 아파서 아침에 못 깨어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R은 훌쩍거리다가 내 손을 잡고 잠이 들었다. 나는 잠이 안 와서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이번에는 생각없이 그냥 왔지만 다음부터는 외국 여행할 때 여행 보험을 꼭 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You never know. 정말 외국에 나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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