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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의 피렌체 여행기_29. 산타 크로체의 정원
01/07/19  

관광객들과 기도를 드리러 온 성도들로 가득 차 있던 본당과 달리 산타 크로체의 정원은 이상하리만큼 한적하고 조용했다.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성당 건물과 잘 어우러진 정원에는 눈이 닿는 곳마다 초록빛 잔디밭이 싱싱하게 펼쳐져 있었다.

 

R과 나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둘러 싸인 전쟁 용사 기념비 앞에 가서 잠깐 묵념하고 고요한 정원을 둘러 보았다. 우리 외에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그 큰 정원이 우리 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파란 하늘과 키가 큰 나무들, 그리고 성당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면서 셀피를 찍기 시작했다. 우스꽝스런 사진이 나오면 폭소를 터뜨렸고, 더 웃기려 서로 떠밀다가 넘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가 도망가면 R이 잡으러 오고 안 잡히려 피하면서 갑자기 술래잡기 하듯 잔디밭 위를 뱅글뱅글 돌기도 했다. 천진한 어린애들처럼 놀고 있는 우리를 내려다보며 무성한 나무 잎새 속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깔깔 웃으면서 R과 노는 와중에 문득 의문이 생겼다. ‘이 넘치는 평화와 기쁨은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진실로 우리의 마음 속엔 기쁨이 가득했다. 평화롭고 고요한 정원 속에서 R과 나는 순진한 어린 아이들의 마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갑자기 찾아 온 그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 속에서 서로 따뜻한 손을 마주 잡고 있는 그 순간에 정원 밖 세상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불현듯 마음 속에 등불이 켜졌다. 우리가 즐거워 소리치고 웃으며 놀고 있는 그곳은 700년 동안 기도와 명상으로 이어져 온 수도원이었다. 대대로 청빈 검약과 영적 충만 속에 올린 프란치스코 파 수도사들의 기도가 그 정원에 맴도는 것 같았다. 영적인 기운이 온 성당과 정원에 가득 차 우리는 어느새 그 순수한 기쁨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가 우리에게 강림한 듯한 순간이었다.

 

영원히 그 속에 머물고 싶은 산타 크로체의 정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성당을 나왔다. 산타 크로체 광장에 서서 성당의 앞 모습을 또 한참 바라 보았다. 새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파란 피렌체 하늘 밑에 700년 동안 변함없이 서 있는 수도원 성당. 그 정원에서 경험했던 완벽한 평화와 기쁨의 순간을 앞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히 잊지 않기를 기도했다.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우리 숙소 근처 산토 스피리토 광장에 벼룩시장이 선다고 해서 둘러 보기로 했다. 찾아가는 길에 지나가는 피렌체는 중세 골목마다 사진기만 들이대면 그대로 작품이 되었다. 골목마다 가득 찬 예술적인 분위기의 작은 가게들. 자연스럽게 가꾼 꽃 화분들과 무심하게 길가에 놓아 둔 자전거까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웠다. 오랜 전통의 예술 도시에서 사는 피렌체 사람들의 미적 감각은 그들의 생활 자체였고,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너무나 많기에 그대로 모방이나 복사만 한다 해도 충분히 예술적인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을 돌면서 가다가 우연히 실크 스카프 전문점을 발견했다. 구경만 하자고 들어갔다가 가게 안에 가득 찬 이탈리아 산 실크 스카프들을 보니 사고 싶은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미술관과 성당을 돌면서 유명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들의 상품들이 대부분 조상에게 물려 받은 시각적 모티프를 활용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 재확인 했던 차였다. 이름없는 조그만 가게였지만 명품 스카프 못지 않게 품질과 디자인이 뛰어났다.

 

R과 나는 비단을 고르는 왕비와 공주처럼 느긋하게 피렌체 산 실크 스카프를 둘러 보았다. 부드러운 천을 만져보며 나는 아련한 숲 속 풍경같은 녹색 스카프를 골랐고, R은 미조니 풍의 기하학적 무늬가 펼쳐진 핑크 스카프를 선택했다. 스카프 가게 주인은 영어를 잘 하는 중년 이탈리아 아저씨. “아름다운 마담과 따님은 참으로 높은 안목을 가지셨군요. 최고의 디자인을 고르셨습니다!” 마치 귀족 부인과 영애를 대하듯 찬사를 늘어 놓으며 우리가 고른 스카프를 마치 황금을 싸듯 정성스럽게 포장해 준다. 포장한 스카프를 또 자기 가게 로고가 찍힌 브라운 색 종이 가방에 잘 넣고 공손하게 손에 들려 주었다. 마음에 없는 아첨이나 판에 박힌 태도가 아니라 스카프 장인의 자존심과 진심이 어린 자세같이 느껴지면서, 명품이란 브랜드에 상관없이 ‘정확한 품질과 고객을 관리하는 마케팅의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R과 나는 이탈리아 최고 품질의 실크 스카프를 구매한 기분이 되어 가벼운 발 걸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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