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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의 피렌체 여행기_30. 팔라쪼 디 비앙카 카펠로 (Palazzo di Bianca Cappello)
01/14/19  

벼룩시장이 서는 곳은 피렌체 도착 첫 날 크레디트카드 분실 신고를 하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갔던 산토스피리토 광장 근처였다. 가는 길에 시뇨리아 광장에서 코지모 1세의 청동 동상을 보았다. 갈기를 휘날리는 말을 타고 있는 늠름한 모습이었다. 결단력과 냉철함, 야심과 자신감이 넘쳐 흐르는 모습이다. 시뇨리아 광장을 몇 번이나 지나갔지만 자세히 본 적은 없어서 이번에는 한참을 서서 살펴 보았다.

 

실크 스카프를 사고 코지모 1세의 동상을 구경하면서 느지막이 산토스피리토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벼룩시장이 이미 문을 닫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인들이 짐을 다 싸고 치워 버린 상태여서 별로 구경할 것이 없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저녁은 우리 숙소 근처에 보아 둔 오스테리아(Osteria)에서 먹기로 했으므로 다시 숙소 쪽으로 향했다.

 

구글맵을 보면서 골목을 구비구비 돌다가 조금 넓은 길이 하나 나왔다. 걸어가다 보니 유난히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 있다. 좌우에 쭉 늘어선 집들은 평범하게 벽돌로 지었는데 이 집은 호화로운 대문에 실버와 검은색으로 그린 화려한 벽화 때문에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앗, 집의 정면 중앙에 메디치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다! 누구의 집일까? 가까이 다가가 벽에 새겨진 현판을 읽어 보니 팔라쪼 디 비앙카 카펠로 (비앙카 카펠로의 궁) 라고 써 있다!

 

피렌체 여행을 계획하면서 몇 권의 책을 읽던 중에 비앙카 카펠로(Bianca Cappello)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비앙카 카펠로는 베니스 출신의 미인이었다. 15세에 피렌체에서 온 청년과 만나 피렌체로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된다. 아이까지 낳고 살던 중 피렌체 군주 코지모 1세의 맏아들 프란체스코를 만나게 되었다. 비앙카에게 첫눈에 반한 황태자 프란체스코는 이미 결혼을 해서 부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앙카와 살겠다고 결심한다. (그 와중에 비앙카의 남편이 길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프란체스코와 비앙카가 개입했다는 설이 있다) 비앙카는 프란체스코의 아들을 낳았다. 왕자비 사이에 딸만 넷을 두었던 프란체스코에게 기쁜 소식이었지만 정식 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적자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부모 코지모 1세와 엘리노어 왕비도 비앙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란체스코의 사랑은 불타 올랐다.

 

비앙카를 궁에 들일 수 없었던 프란체스코는 비아 마지오(Via Maggio) 길에 비앙카를 위한 집을 마련했다. 메디치가의 문양을 붙인 호화로운 집이었다. 메디치 군주의 왕궁이었던 피티 궁과 베키오 궁의 중간 쯤에 위치했다. 그 집이 우리 눈앞에 나타난 비앙카 카펠로의 집이다. 프란체스코와 비앙카는 이 집에서 미래를 약속하며 사랑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왕자비가 사망한다. 비앙카 카펠로는 드디어 궁으로 입성해 프란체스코와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리고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메디치가의 사람들은 이들의 결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베니스 출신의 비앙카를 믿지 않았고, 비앙카에게 빠져 국정을 소홀히 하는 프란체스코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특히 프란체스코의 동생 페르디난도 왕자가 큰 불만을 가졌다. 1587년 10월, 프란체스코와 비앙카 내외는 침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야사에 의하면 페르디난도 왕자와 그 추종자들이 독살한 것이라는 설이 있고, 역사 기록에 의하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은 것이라고 한다. 21세기에 들어와 유해를 부검한 결과, 비앙카의 유해에서는 독극물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프란체스코의 유해에서는 말라리아 감염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어느 쪽이 직접 사인인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500년 동안 이어졌던 메디치 왕조의 최대 러브스토리이자 스캔들이었던 프란체스코와 비앙카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들이 함께 했던 사랑의 보금자리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왔다. 지금은 피렌체시 소속으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여행 오기 전에 조금 공부한 덕분에 나는 비앙카 카펠로의 집 앞에서 500년 전의 르네상스 러브스토리를 R에게 흥미진진하게 들려 주었다. R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재미있게 듣다가, “엄마, 집 정면에 메디치가 문양이 없었으면 그냥 지나칠 뻔 했는데, 그치?” 라고 덧붙였다. 정말이다. 파란 공 하나에 빨간 공 다섯 개가 그려진 메디치가 문양이 있어서 관심을 기울였고 알아 본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황태자가 비앙카를 만나러  폰테 베키오를 건너 중세의 골목을 지나 팔라쪼 디 비앙카 카펠로 쪽으로 말을 타고 달려 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면서 천천히 마지오 길을 빠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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