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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 (The Crown c. 2015)
02/25/19  

엔리케 마르티네즈 셀라야 (Enrique Martinez Celaya 1964 - )

(캔버스에 유채와 왁스 100 in. x 78 in. 마르티네즈 셀라야 가족 컬렉션 소장)

 

매년 이맘때쯤이면 샌 마리노(San Marino) 시에 있는 헌팅턴 라이브러리(Huntington Library)에 들러 본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들이 드디어 봄 준비를 하고 자주빛 목련이 꽃망울을 맺는 이즈음 활짝 피어나는 동백꽃을 보기 위해서이다. 갖가지 색깔의 동백꽃은 과연 한창이었다. 로즈 가든에 장미꽃이 피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생명이 가득한 정원에는 벌써 봄과 여름이 가까이 와 있는 듯 했다.

 

정원을 돌아본 후 미술관에도 꼭 들러 보는데, 이번에는 아주 뜻밖의 그림을 만났다. 본관 이층 복도 끝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USC 미술대학 교수인 쿠바계 화가 엔리케 마르티네즈 셀라야의 작품으로 화가와 헌팅턴 라이브러리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대여 전시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그림 속의 인물이 쓰고 있는 왕관과 의상으로 인해 어느 왕족의 초상화 인줄 알았다. 그러나 눈이 가득 쌓인 숲 속에 서 있는 소년의 얼굴을 보니  이 그림이 일반적 초상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앙상한 나무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흐릿한 배경은 안개인지 달빛인지 알 수 없고, 왕관을 쓴 이 소년이 왜 이 눈 내린 숲 속에 홀로 서있는지도 알 수 없다. 크게 뜬 두 눈은 충혈되어 있고, 금방 눈물이라도 흘러 내릴 듯 애잔한 빛을 띠고 있는데, 머리에 쓴 왕관과 어깨에 걸친 모피 옷은 소년의 가냘픈 몸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그림 앞에 서서 들여다보면 볼수록 왕관을 쓴 소년의 이미지는 미묘한 심리적 압박감을 자아낸다. 공포, 또는 강박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런 긴장감은 화가가 의도한 분위기일 것이다. 이 소년이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마저 확실하지 않아, 그가 현실의 인물인지 아니면 상상 속의 인물인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이 그림은 혹시 그가 꾸고 있는 스산한 꿈속일까? 아니면 그는 동화나 신화 속의 인물일까? 혹은 누군가의 기억일까?

 

현실과 상상, 동화의 세계와 미스테리가 혼합되어 시선을 사로잡는 이 특이한 그림은 이상한 매력으로 가득했다. 마법에 걸린 왕자처럼 얼어붙어 있는 이 소년의 얼굴을 보며 끝없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아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이 세상은 이미 셀 수 없는 그림으로 가득 차 있지만, 이처럼 새롭고 색다른 그림이 또 나올 수 있는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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