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자라게 버려두라(마태 13,24-43)
04/30/18  |  조회:281  

“죄 지은 자의 죄를 미워하되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이 말과 연관지어 생각할 때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란 그 사람의 인격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와 죽음의 세력이 극복되어 구원이 베풀어지고 있는 은총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왜 세상에 악이 있는가? 어찌하여 죄가 있고 고통이 있으며 우리에게 죽음이 있는가를 반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나쁜 상황을 인간에게 허락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적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로 잘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의 신비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시련과 단련을 통하여 우리 육신은 새 사람으로 부활할 수 있고, 우리의 자유와 봉사가 더욱 영광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명은 악과 훌륭히 투쟁하여 굳건히 살아나가 이기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라지를 뽑아 버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버려둠은 곡식을 잘못 뽑을까봐 참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내의 이단도 가라지 같이 분별하기 어려우며, 이 이단이 도리어 교회의 진리를 밝히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 자기가 잠시나마 가라지일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자기 죄과에 너무 무자비하거나 남을 단죄하는데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는 예수의 가장 실제적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의미는 첫째, 좋은 씨를 망치려는 악한 세력이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깨어 지켜야 합니다.

둘째, 이 세상에는 선인같은 악인, 악인같은 선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선악을 구별하는 데는 신중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판단은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심판은 순간의 선악보다 전 생애를 보는 것입니다. 죄인이 성인이 되는 수도 있기 때문에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넷째, 결국은 주님의 심판이 오고야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죽은 후와 종말의 날에 선악은 구별되어집니다.

다섯째, 심판할 권리는 하느님만 갖고 계시며, 그분만이 생의 전체를 보실 수 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 비유의 경고를 요약하면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것과, 하느님의 심판이 꼭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권세있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내치시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높이셨으며”(루가 1,52)의 노래와 같이 우리가 남이나 우리 자신에 대해 선한 이로 인정하거나 자부하더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심판을 면치 못하는 자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겸손하게 뉘우치고 그 마음을 하느님께 드리는 자에게는 항상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하심이 있고 어려움 중에서도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우리는 대개 남을 평가할 때 외적 조건이 그럴사하면 그 사람을 우러러 보고,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을 멸시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전혀 자기 탓이 아닌 환경적 조건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고 차별대우하기가 일쑤입니다. 단순히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흑인이 백인 세계에서 멸시당하는 일이라든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서 천시당하는 일들이 모두 그러한 것들입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도 가라지가 나타났다하더라도 하느님은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을 보시고 평가하시는 분이시기에 외모나 환경은 하느님의 눈에는 전혀 관심이 되지 못합니다. 좋은 밀이 언제 가라지가 될지도 모르며, 가라지일지라도 언제 주님의 은총으로 좋은 밀이 될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신중한 태도로 하느님의 뜻만을 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나, 판단은 항상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그르칠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이나 판단은 항상 정확하시고 큰 의미를 지닙니다.

 

김몽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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