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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신의 노르웨이 여행기_15. 베르겐, 겨울 왕국
06/15/20  

푸니쿨라가 덜컹 정차하며 스르륵 문이 열렸다. 나는 계단을 두어 개 올라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고 플뢰엔 산 정상으로 발을 내딛었다. 시야가 활짝 열리며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덮친다. 그곳은 꽁꽁 얼어 있었고, 보이는 것은 모두 하얗고 아득한 겨울 왕국이었다.

 

디즈니사의 만화 영화 ‘겨울 왕국 (Frozen)’은 노르웨이 베르겐을 배경으로 탄생했다고 한다. 만물이 꽁꽁 얼어붙는 노르웨이의 겨울이 만화 영화 속에 묘사되기까지 베르겐의 역사와 풍광, 지형 등이 참조되었다고 들었다. 베르겐에 올 때부터 만화 영화 ‘겨울 왕국’을 기억하고는 있었으나, 나잇살 먹은 어른이 만화 영화를 여행의 동기 유발점으로 삼는 것이 우스운 것 같아 크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플뢰엔 정상에서 내려다 본 겨울 베르겐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꿈처럼 아련히 보이는 베르겐 풍경 등을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곳은 그대로 겨울 왕국이었다.

 

산 아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산 위에서는 싸라기 눈이 날리고 있었다. 눈과 비와 습기가 합쳐져서 온 세상은 하얗고 거대했으며 넓은 계단식으로 만든 전망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시각에 나는 하얀 겨울 왕국 한가운데 서서 베르겐을 내려다 보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전망대 중앙에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세워놓은 가로등 크기의 촛불등이 노란색으로 빛났다. 멀리 바다에서 보면 플뢰엔 산 위에 깜박이는 정다운 불빛이겠지. 베르겐 겨울 왕국은 춥지만 따스했고, 혼자였어도 쓸쓸하지 않았다.

 

뺨과 눈꺼풀에 젖어 드는 습기가 그대로 얼음이 되어 버리는 추위 속에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문득, ‘따각 따각’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보았다.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백인 여자가 양팔로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몸집이 상당히 컸고, 짧은 금발 머리가 바람에 마구 헤쳐진 그녀는 추위에 얼굴이 꽁꽁 얼어서 끼고 있는 안경에 뿌옇게 서리가 끼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다리를 다쳐 임시로 목발을 짚은 것이 아니라 두 무릎 아래가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목발 외에도 두 다리에 보조기기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나는 잠시 서로를 쳐다 보고 금새 눈길을 돌렸다. 나는 전망대 중앙에서 뒤로 물러 났고 그녀는 천천히 전망대 앞으로 목발을 짚고 걸어 가기 시작했다. 바닥이 얼어서 미끄러웠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조마조마 해졌다. 보통 사람도 조심해야하는데 목발을 짚은 장애인이 잘못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내가 서 있었던 전망대 중앙까지 가서 멈추더니 핸드폰을 꺼내서 앞에 보이는 베르겐 전경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나서는 그대로 가만히 서서 눈을 맞으며 앞을 바라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현지 주민이 아니라 관광객이 분명한 그녀가 목발을 짚은 채 불편한 다리를 끌고 이 산 위에까지 올라와 눈을 맞으며 베르겐 하늘 너머, 바다 너머, 저 멀리까지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고작 무릎 관절, 그것도 오른편 한쪽만 조금 불편한 내가 멀쩡한 사지에 감사할 줄 모르고 조바심을 내며 불안해 하고 걱정한 것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눈 속 거대한 풍경 속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그녀는 의지와 자존을 동시에 보여주는 꿋꿋한 인간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전망대를 떠났다. 겨울 왕국 플뢰엔 산 정상에서 나는 나머지 베르겐 여행,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을 담대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귀한 영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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