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 거목’ 문동환 목사 별세
03/18/19  

민주화 운동의 대부’,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 등으로 불렸던 문동환 목사가 지난 9일 향년 9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9일 ‘한겨레’에 따르면 고인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립신문> 기자이자 목사였던 부친 문재린과 여성운동가였던 모친 김신묵의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인은 그곳에서 형 문익환,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 명동촌은 한국적 개신교의 맹아였을 뿐 아니라 민족교육의 산실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곳이다. 명동촌은 문동환의 고조부인 문병규와 김약연 등 네가족 142명이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옛 고구려땅에 정착해 개간했던 한인집단공동체였다. 그곳에 세운 명동학교에서 문익환, 윤동주, 나운규 등이 공부했고,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뒤 용정에 연 은진중학교에서 문동환과 안병무, 강원용 등이 수학했다.

 

고인은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 목사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중고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6년엔 김재준이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1년간 다닌 뒤 경기도 장단중학교와 서울 대광중고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웨스트신학교,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처 하트퍼드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1년 모교인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초빙 받아 유학중 만난 평생의 반려자인 미국인 부인 해리엇 페이 핀티백(문혜림)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1970년 전태일 분신과 유신헌법 공포를 겪으며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5년 동료 해직 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를 마련했다.
1976년 3월 1일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22개월간 복역했다. YH사건으로 또다시 구속됐다가 유신정권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다.
1979년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한신대 교수로 복직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돼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5년 귀국해 한신대에 복직했으며 이듬해에 정년으로 퇴임했다. 퇴임 후 미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가 됐다. 국회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3당 합당에 반대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199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던 고인은 2013년 귀국해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구조적 원인이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라는 문제인식을 토대로 민중 신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인은 남다른 교육관으로 학교 현장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특히 번지르르한 말만을 배우지 않고, 제대로된 가치관을 심어서 신앙인이기에 앞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고인은 1972년 출간된 <자아확립>이란 책의 서문에서 ‘아무리 교실에서 그럴 듯한 소리를 하고, 강단에서 감명 깊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생이 사람답지 못하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비참한 일이다. 한국에 있어서 비극 중의 비극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큰소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흔히 그 생이 더 냄새가 난다는 것. 대중 앞에 나설 때, 앞에 마이크가 많은 사람일수록 뒤에서는 연막을 더 쳐야 하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고인은 늘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행동했다. 제자들에게도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앞장서 선교신학대학원을 세웠다. 이곳에서 그는 제자들로 하여금 세 가지를 통해 배우도록 했다. 첫째 선각자의 글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둘째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우고, 셋째 현장에서 일하면서 사회 현실과 부딪친 것을 다시 대화하면서 배우라는 것이었다. 그가 1972년 만든 ‘새벽의집’ 공동체도 실천의 장이었다. 새벽의집에서는 6가정 50여 명이 개인 집들을 처분하고 가족연합체를 만들어 살았다.

 

고인은 90대 중반까지도 집필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예수정신을 드러내려 애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4년전 출간한 <예수냐 바울이냐>다. 그는 책에서 바울이 예수의 본정신을 망친 인물로 질타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바울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신학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야합해 식민지 쟁탈과 이방인 살육에 앞장서면서 메시아와 왕조, 절대권력, 권위주의, 선민의식을 거부한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종교제국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인은 진보 개신교계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80살이 지나면서 민중신학에도 회의가 생겼다.”면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을 민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변호인>을 본 뒤 “우리가 있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노무현이 거기에 응한 것처럼 우리도 응해야 이 험악한 세상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았다. 그는 공동체를 이루려 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서울 수유동 밝은누리를 방문해 최철호 목사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끼리만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 기존의 잘못된 삶을 단호히 끊은 젊은이들이 집단적 예수, 집단적 모세가 되어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고인의 제자인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고인은 안으로는 동병상련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며 “밖으로는 대형교회의 성장 축복 신앙을 맘몬(mammon) 숭배(배금주의)로 규정하고 현대사회 악의 본질을 분명히 깨닫고 이를 끊어내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단호한 회개를 주창하며 새벽을 열었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혜림 씨와 아들 창근·태근, 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 )씨 등이 있다. 장례예배는 오전 9시 한신대 채플실에서 진행됐으며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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