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2017.09.11 09:40

타운뉴스 조회 수: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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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국으로 돌아가기 전 양로원을 방문해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할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내게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물으셨다.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여러 번 방문했음에도 할아버지는 마치 그곳에서 나를 처음 만난 것처럼 내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몹시 의아한 눈치셨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내게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차마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삼 년째 하반신이 불편하여 양로원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고 계시고 몇 달 사이 몹시 야윈 여든아홉의 할아버지를 뵙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귀국 4주차에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에 도착한 후 정착은커녕 짐을 풀 엄두조차 못 내고 대충 당장 필요한 것들만 꺼내서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남편은 해외 출장 스케줄이 잡혀 있었고 시어머니에게 아이 넷을 맡겨야하는 상황이라 여러 가지 생각에 마음이 들락날락했지만 일단 만사를 젖혀두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는 배웅을 하기 위해 혼자 미국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혼자 겪으셔야 할 부모님 곁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슬하에 31녀의 자녀와 11명의 손주, 5명의 증손주를 두셨지만 미국에 가족이라고는 장남인 우리 아버지뿐이었다.

 

임종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난 목요일 미국에 돌아왔고 할아버지께서는 다음날인 지난 금요일 임종하셨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잠시 할아버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면 할아버지는 1928년 한국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나셔서 13세에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하여 고학으로 학업을 마쳤고 해군에 입대하였다. 그 후 해병대가 창설되면서 해병대원이 되어 6.25 전쟁에 참전하였고, 인천 상륙 작전에도 참여 하여 화랑 금성 무공 훈장, 을지 무공 훈장 등을 받으시고 국가 유공자로서 평생 군인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31녀를 두신 할아버지는 두 자녀를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다른 두 아들은 직업군인으로 키워내셨다. 그들 중 한 명은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으며 다른 한 명은 현재 공군 장군으로 일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3년 전 몸에 마비가 오면서 거동이 불편해지시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가족과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부지런한 삶을 실천하시며 몸소 가장 훌륭한 나의 롤모델이 되어 주셨다. 92년 미국 오신 이후에는 맞벌이 부부였던 나의 부모를 도와 손주들을 돌보는 일을 자청하였었는데 지금도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셨던 엘에이 갈비와 곰탕, 나박김치를 떠올리면 혼자 빙그레 미소를 짓곤 한다.

 

군인이셨던 할아버지는 모든 세탁물을 각을 잡아 개고 다림질을 하곤 하셨는데 때로는 청바지 가운데 줄을 잡아 다림질하시거나 집에서 입고 자는 잠옷마저 빳빳하게 다림질하곤 하셨다. 손녀에게 잘 다려진 옷을 입히고 싶어 하셨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사랑이었음을 철부지였던 내가 알 턱이 없었고 잠옷을 왜 다림질 하냐며 툴툴거렸던 일이 생각난다. 하지만 내 평생 잠옷을 다려준 사람은 아마도 할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각 잡은 해병대 모자, 집에서도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잘 빗어 넘긴 반듯한 머리와 옷차림, 오차 없이 루틴대로 이뤄지는 부지런한 하루, 도저히 쫓아갈 수 없던 빠른 발걸음, 은은한 은단향, 냉동고를 가득 채우던 낚시로 잡아온 생선들, 방에서 울려 퍼지던 구슬픈 엔카. 여전히 할아버지의 향수가 내 가슴에 가득 남아있다.

 

언젠가는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믿기에 이 작별이 덜 고통스러울 거라 위로해 본다. 여전히 내 아버지 안에, 내 안에, 또 나의 아이들 안에 살아 숨 쉬는 할아버지의 자취들을 볼 때마다 그를 기억하며 미소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한 평생 열심히 살다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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