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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05/18/20  

해마다 이맘 때, 떨어진 꽃잎들이 오고가는 자동차에 뭉개져 흉측하게 보이던 자카란다가 이제 막 보기 좋게 피었다. 만개(滿開)가 예년보다 한 보름 정도 늦었다. 향기가 없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 빛깔만은 보는 이의 눈을 현혹시켜 향기 없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황홀경에 빠져들게 만든다. LA의 오월은 바로 이 보랏빛 꽃, 자카란다가 있기에 더 아름다워진다.

 

참 많은 분들이 5월을 예찬했다. 황금찬 시인은 ‘오월은 사월보다 정다운 달’이라고 하면서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이라고 했다.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마는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미루나무 잎처럼 은은하게 사랑하고 싶다는 말이라 생각하자.

 

피천득은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라고 하면서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 ‘모란의 달’이라고도 했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이라며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라 걱정하며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이 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오월이 가는 건지 유월이 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봄의 끝자락을 장식하는 오월은 봄과 여름을 연결해주는 달이기도 하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나의 마음속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었다며 ‘모든 새들 노래할 때 나의 불타는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하겠노라고 했다. 오월의 활짝 핀 꽃들을 보면서 춘정이 발동하여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하겠노라는 선언이다.

 

이해인은 ‘오월에 하늘이 잘 보이는 숲으로 가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물오른 수목처럼 싱싱한 사랑을 우리네 가슴’속에 퍼 올리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부르며 ‘빛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욕심 때문에 잃었던 시력을 찾아 빛을 향해 눈뜨는 빛의 자녀 되게 해달라'고 했다. 수녀가 찬미하는 어머니는 마리아를 가리키는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오월의 맑은 하늘이 보이는 숲에서 힘차게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사랑을 가슴속에서부터 불러내고 어머니의 사랑까지 더해 빛을 보게되면 욕심으로 가득찬 눈을 바르게 뜨고 빛을 향하겠노라는 신앙 고백의 시가 아닐까.

 

연주곡들 중 비발디의 4계는 1, 2, 3악장에서 ‘봄’을 찬미한다. 바이올린 선율을 듣고 있노라면 새들이 노래하며 봄을 맞이하고, 샘물이 미풍에 살랑거리며 졸졸 흐르는 소리를 낸다. 먹구름과 번개가 하늘을 달리고, 뇌성은 봄이 왔다고 알린다. 폭풍은 멎고 새들이 다시 상쾌하게 노래를 시작한다. 아름답게 꽃이 핀 초원에는 나뭇잎과 잔디가 살랑거리고 목동이 충견(忠犬) 옆에 잠들어 있다. 백파이프의 흥겨운 소리에 맞추어 님프와 목동은 봄의 안식처에서 화려한 춤을 춘다.

 

괴테도 오월을 노래했다. ‘오오 눈부시다/ 자연의 빛 태양은 빛나고 들은 웃는다/ 나뭇가지마다 꽃은 피어나고 떨기 속에서는 새의 지저귐 넘쳐 터지는 이 가슴의 기쁨 대지여/ 태양이여/ 행복이여/ 환희여/ 종달새의 노래와 산들바람을 사랑하고 아침에 핀 꽃이 향긋한 공기를 사랑하듯이 뜨거운 피 가슴 치나니/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내게 청춘과 기쁨과 용기를 부어라/ 새로운 노래로 그리고 춤으로 나를 몰고 가나니 그대여 영원히 행복하여라/ 나를 향한 사랑과 더불어’ 만물이 생동하는 봄기운에 취한 사랑의 고백과 사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격정이 느껴진다.

 

오월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오월, 그 찬란한 이름도 화려한 모습도 올해는 오롯하게 느낄 여유가 없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는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만나기도 어렵다. 예쁜 꽃들이 춤추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지만 우리는 노래를 부르지도, 춤을 출 수도 없다. 우울한 소식들로 우리들의 마음은 꽉 막혀버렸다. 그 무엇도 우리를 속 시원하게 뚫어주지 못한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고개를 치켜세우고 가슴을 열고 숨을 깊게 마시고 길게 내쉬자.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쭉 뻗어 보자.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봄기운을 힘차게 마시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지 않아도 얼마든지 찬란한 오월의 태양을 즐길 수 있다.

 

벌써 자신의 자리를 반 이상 잃은 오월이지만 자카란다가 빚어낸 보랏빛 향연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오월의 초록도 우리 것이다. 마음껏 가슴에 담아 보자.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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