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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청정기
01/11/21  

연말에 제자가 큰 선물을 갖고 왔다.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가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며, 현관에 물건을 놓고는 집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도망치듯이 바쁘게 가버렸다.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이것저것 자상하게 챙겨주는 제자다. 부엌의 환풍기가 부실하다며 사람을 보내 교체해주었고, 건강에 좋다며 샤워기를 바꿔주기도 했고, 한국에서 공수한 김치를 -떨어지지 않게- 일 년 내내 직접 배달해주고 있다. 부담스럽다고 하지 말라고 계속 만류했지만 제 것을 사면서 선생님 것도 사는 거라면서 맛있게 드시라고만 한다.

 

이번 선물은 공기를 깨끗하게 해주는 기능과 온도를 높이거나 낮춰주는 기능까지 갖춘 아주 예쁘게 생긴 공기청정기였다. 어디에 놓을까 고심하다가 거실에 두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저녁 무렵 옆집에서 흘러 들어와 우리집안 공기까지 잠식하는 담배 연기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공기 청정 기능 때문에 오후 6시부터 10시 사이에는 자동으로 켜졌다가 꺼지도록 했다. 집밖에서 전화기로도 조정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최첨단 기기를 마음껏 즐겼다. 한 사나흘 지나 아들이 자기 방에 웃풍이 높고 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와 춥다며 제 방으로 옮겨도 좋은가 정중하게 물었다.

 

잠시 망설였다. 담배 연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할까? 아니면 아빠 제자가 준 선물이라 안 된다고 할까? 아니면 거실의 온도가 네 방보다 더 낮다고 할까? 머릿속은 그렇게 움직이는데 말은 다르게 나왔다. “그래, 네가 사용하도록 해라.” 아들이 좋다고 갖고 올라갔다 내려와 사용 설명서가 어디에 있는가 물었다. 설명서를 주면서 “전화기에 엡을 깔면 전화기로도 조정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들은 신이 났다.

 

막내라 그런지 무엇이든 제 기분과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고 산다. 아무리 제 방에 놓고 싶더라도 아빠가 선물로 받은 것을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달라고 하는지...... 마음 속 한 편에서는 섭섭하기도 하고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이나 마음과 달리 말은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버렸으니 어쩐단 말인가?

 

그날 밤 생각이 많았다. 저런 놈이 과연 사회생활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부모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저만 생각하는 놈. 앞으로는 절대 녀석의 생각대로 하지 않겠다.

 

아침이 되었다. 난 오트밀을 끓이고 있었다. 동부시간에 맞춰 일하기 때문에 아침 6시부터 일하다 내려온 아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커피 좀 끓여 주실래요?" "아빠 바쁘다 네가 끓여 먹어. 오늘은." "알았어요. 아빠." 아들은 커피콩을 갈기 시작했다. 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는 아들이 말했다. "아빠 달걀 프라이 잡수실래요?" "아니, 됐어. 너나 해먹어라." 그리고 오트밀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서둘러 출근길에 나섰다.

 

그날 저녁, 아들이 아내와 내게 봉투를 한 장씩 주면서 말했다. "아빠, 엄마, 메리 크리스마스!" "뭐냐? 이 건?" 아빠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현금을 넣었어요. 아빠,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어서." "그래? 안 그래도 되는데...... 고맙다." 아이들에게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때, 선물 대신 현금을 줘 버릇했더니 녀석도 따라서 한다. 봉투 속에 제법 큰돈이 들어 있었다.

 

어젯밤의 섭섭했던 마음이 싸악 풀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들은 약속대로 십일조를 자동 이체하도록 해서 매달 두 번씩 우리 계좌로 딱딱 들어오고 있다. -물론 십일조에 훨씬 못 미치는 금액이지만- 어제 저녁에는 이 점을 깜빡했는가 보다. 녀석이 공기청정기를 제 방으로 옮겨도 좋으냐고 물어볼 만하지 않은가? 마음이 흔들린다.

 

아니다. 숙식비를 받지 않고 있지 않은가? 보스턴에서 아파트 비와 생활비로 적지 않은 돈을 지출해야 했는데 재택근무하면서 숙식비를 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것도 내가 큰 실수를 했다. 작년 3월에 재택근무 한다고 집에 들어와서 몇 달 지난 후, 숙식비라고 봉투를 내미는 것을 아빠 집에 살면서 무슨 숙식비냐며 안 내도 좋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가려하니 아래층 전체에 이미 커피 향이 진동하고 있었고, 아들은 달걀 프라이를 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제자가 전화했다. 새해 인사와 함께 청정기가 잘 작동하고 있는가 물었다. 덕분에 아주 쾌적한 공기를 즐기고 있다고 했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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