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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 정치
04/12/21  

 

그동안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고국의 친구나 친지들, 심지어 사돈까지 열심히 한국의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알려왔으나 일언반구(一言半句)도 하지 않았다. 각 정당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사람들도 있었고, 남들로부터 받은 글이나 동영상을 그대로 보내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확실하게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내 가족이나 친지들에게도 전달해주고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몇 해 전 가깝게 지내는 후배의 소개로 알게 된 한 후보는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던 터라 선거 운동 시작 무렵에 응원을 하기도 했다. 그가 정치에 발을 디뎌 몇 번의 낙선과 당선을 거듭하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확실한 정치적 소견을 굽히지 않고 추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정도 지나면서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상대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과 비난이 선거운동의 80% 이상 차지하는 것을 보면서 정이 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그에 대해서 내가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했던 그의 정치적 행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소신도 없어 보였다. 그가 주장하는 정견이나 앞으로 펼칠 것이라는 정책도 전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를 높이 샀던 것은 자기 정당의 정책과 정치적 추진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면서 탈당으로 맞서는 그의 당당함이었다.

젊은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이제는 보통의 정치인이 되고 만 것이다.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에 열을 올리지 않고 시민들을 위한 정책이나 진정성 있는 복지를 주장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고 해도 이번 선거에서는 당선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의 정치적 입지나 행보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비전을 갖고 멀리 봐야 한다. 눈앞에 닥친 일에 급급해서 나아가는 정치인에게 그 누가 기대를 하겠는가.

 

나는 본래 그 어떤 정당을 특별히 지지하지 않는다. 특정 정당 소속여부를 구분하여 사람을 보거나 평가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사람만을 본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한국 정치에 있어서는 사람만 봐서도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정당에 의해 사람이 만들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번 한국의 두 곳에서 벌어진 시장 선거를 지켜보면서 더 확실해졌다. 사람이 아니라 정당이다. 만일 당선된 사람이 여당에서 출마했다면 당선되었을까? 낙선된 사람이 야당에서 출마했어도 낙선했을까?

 

과연 사람이 아니라 정당을 보고 투표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제 이런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다. 정치인 한 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자기 소신대로 펼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 이번 선거에서 증명됐다. 정당의 힘을 통해서만 일이 추진되고 사람이 움직여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영 김 미 연방하원의원을 지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공화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국민들을 선동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그로 인해 국회의사당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심지어 의사당 안으로 난입하였고, 총기발사로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그에 대해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지적했다.

이로 인해 영 김 의원은 지금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하거나 도망가려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언행과 정치적 입장에 대해 밝히고 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심지어 자신에게 ‘내 후원금을 받았으면 공화당을 위해서 앞장서야지 공화당에 역행하는 일을 하느냐’고 다그치는 유권자에게도 자기의 정치적 견해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소신 있는 정치인임에 틀림없다. 다음 선거에 이기고 지고를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면서 자기의 정치 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니 비전을 갖고 길게 보는 정치인인 것이 분명하다.

 

같은 정당 안에서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순간 역적이 되고 반동이 되어버리는 정치 현실은 잘못된 것이다. 얼마든지 쓴소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고 잘못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이를 밑거름 삼아 더 나은 정치 풍토를 만들고 당 내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다. 자기 당의 후보가 낙선한 것을 두고 그 원인이 언론과 상대 당의 선거 전략 때문이라며 남의 탓을 하는 세력들이 주류를 이루는 한 나라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서울과 부산에서 단 한 지역구도 빼놓지 않고 싹쓸이 한 이번 선거 결과를 놓고 자기 당의 승리라고 기뻐하는 야당 정치인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은 여당이나 야당,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옳은 길인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자들의 각종 비리와 막무가내식 밀어붙이기, 그리고 현재 국회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당의 횡포에 대한 준엄한 심판인 것이다.

 

입을 꼭 다물고 있자니 입이 근질거려 혼났다. 오늘 오랜만에 할 얘기를 쏟아내고 보니 양치질 한 것처럼 개운하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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