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1.5세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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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전 이야기
05/17/21  

 

스물한두 살 때쯤 나는 유학생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초등학교 동창으로 미국에서 재회하였는데 우리는 죽이 잘 맞아서 자주 어울렸고 자연스레 소위 썸을 타게 된 것이다. 막 썸을 타기 시작했을 무렵 이 친구는 UCLA에서 어학연수 과정을 밟느라 LA 소재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두 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살았다. 남자친구만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었고 다른 두 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들이었다. 원래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고 그저 아파트 렌트비를 절약하기 위해 함께 사는 룸메이트 관계여서 서로 교류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나는 두세 번쯤 그 아파트를 방문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날은 그의 교포 룸메이트 중 한 명이 집에 있었고 마침 저녁 시간이라 부엌에서 한창 요리를 하고 있었다. 요리가 완성되자 그는 자기 먹으려고 만든 스크램블 에그 부리토를 내밀며 먹겠냐고 물었다. 예의상 묻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웬일인지 사양하지 않았다. 일부러 넉넉히 만든 것 같지도 않았기에 내가 그 부리토를 덥석 받아먹으면 그의 저녁이 줄어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마도 프라이팬에서 풍겨오는 계란 냄새가 너무 좋았거나 조금 출출했던 모양이다. 

 

내 기억 속 그의 요리 비주얼은 요리 못하는 자취생의 계란밥 수준이었다.  접시에 덩그러니 토르티야, 계란, 토마토가 보였고 한편에 케첩을 뿌려주었는지 살사를 뿌려주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어울리는 소스가 있었다. 나는 평소 멕시칸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라 부리토며 타코를 숱하게 많이 먹어봤지만 이런 조합은 처음이어서 그 맛이 궁금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계란과 토마토만으로 만들어져서 이게 무슨 맛이 있으려나 싶지만 담백하면서도 부드럽고 조화로웠다. 일반적인 부리토와 달리 해비하지 않아서 부담 없이 두 개, 세 개 계속해서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자친구가 엘에이 아파트를 떠나며 다시는 그 룸메이트들을 볼 수 없었고 이제는 얼굴들도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그 부리토만큼은 종종 생각났다. 그래서 레시피도 찾아보고 여러 번 도전도 해보았지만 이상하게 달랐다. 내가 만들면 비릿한 계란 맛이 너무 강하거나 푹 익은 토마토의 물컹한 식감이 싫거나,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그런 맛이었다. 욕심내어 햄도 넣어보고 치즈도 넣어보고 나름 업그레이드를 시도했지만 매번 맛은 실망스러웠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출시된 비슷한 스타일의 블랙퍼스트 부리토들도 먹어보았지만 영 그때 그 맛이 아니었다. 

 

굳이 레스토랑에서 주문해서 먹고 싶은 대단한 요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때때로 생각이 나는데 다시는 그때 그 맛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도 문득 생각이 나서 직접 만들어봤는데 역시 별로였다. 내가 더 이상 스물둘이 아니고 마흔둘이기 때문인 걸까......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 시절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청춘의 맛 같은 것이었을까...... 

 

나는 스크램블 에그 부리토를 잘 만드는 교포 룸메이트를 두었던 그 당시 남자친구와 3년 넘게 뜨거운 연애를 했고 스물여섯에 결혼해 애 넷을 낳고 살고 있다. 이십 년이나 지나버린 무심한 세월 속에 두둑한 뱃살과 자글자글한 주름살을 얻었지만 가끔씩 그때 그 맛이 그립고 그 당시 푸릇푸릇 싱그럽던 젊음이 그리워지곤 한다. 나중에 남편을 통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 룸메이트는 유난히 요리 솜씨가 형편없는 요리 똥손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맛있게 먹었던 그 부리토는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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