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출산 드라마
05/22/23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고통 순위 3위라는 (1위는 화상, 2위는 절단) 출산보다 더 힘든 것이 나에게는 모유수유와 수면교육이었다. 산통이 극심했던 것은 사실이나 솔직히 24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보니 얼마나 아팠는지 그 고통의 정도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몇 시간 정도야 참을만 하지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모유수유와 수면교육은 그렇지 않았다. 매일 수시로 꽤 오랜 시간, 아프고 힘들었다. 그리고 그 힘겨운 시절을 나와 함께해 준 드라마를 나는 출산 드라마라 부른다. 

내 인생 첫 출산 드라마는 "하얀거탑"이었다.  2007년 1월부터 3월까지 방영했으니 2월 2일에 태어난 첫째와 초보 엄마 아빠의 가장 정신없었던 시기였다. 하얀거탑은 기존의 의학드라마들과 달리 병원 과장직을 두고 벌어지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싸움이 정말 흥미로웠다. 주인공 장준혁이 지나친 야망과 탐욕 때문에 악행마저 서슴지 않으며 점점 심신이 피폐해지는 것을 보며 과연 그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궁금했다. 아기를 재우고 드라마에 몰입해 있으면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어 더더욱 가슴이 쫄깃해졌다. 

그러다가 아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빽 하고 울음을 터트리면 탄식이 절로 나왔다. 젖을 물린 지 얼마 채 되지도 않았는데 아기가 울면 남편은 자꾸 애가 배고픈 것 같다며 나를 쳐다봤다. 나도 장준혁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은데...... 다른 건 다 도와줄 수 있지만 모유수유는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마지못해 일어나 또 아기를 안아야 했다. 첫 아이 모유수유는 그야말로 끔찍했다. 상처투성이 유두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쓰리고 아팠으며 젖몸살이라도 시작되면 정말 눈물을 질질 짤만큼 그 통증이 심각했다. 그래서 지금도 하얀거탑의 주제곡을 들으면 삐걱이는 수유의자에 앉아 홀로 눈물 흘렸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둘째 때 출산 드라마는 "추노". 추노는 제목 그대로 노비를 쫓는 내용으로 2010년 1월부터 3월 말까지 방영했다. 주인공 이대길은 조선 최고의 추노꾼으로 도망간 노비를 무조건 잡아 얼굴에 노비 낙인을 찍게 한다. 내가 산발이 된 머리로 모유와 아이 토로 얼룩진 옷을 입고 모유 수유를 하고 있으면 남편이 나를 보고 "어디 노비 잡으러 가?"하고 묻곤 했다. 내 몰골이 추노꾼 같다며 자주 놀렸고 같이 깔깔거리면 웃었는데 하루는 웃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때는 내가 시작한 사업이 막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라 일이 정말 많고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산후조리도 따로 없이 아기가 울면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들겨야 했던 날들...... 추노꾼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자기 연민으로 번지기 충분했던 시절이다. 

긴장감을 최고조로 만들어주는 두 드라마의 OST 또한 거의 역대급 수준이었다. 하얀거탑과 추노의 주제곡은 노래 전주만 들어도 누구나 그 드라마를 떠올릴 뿐 아니라 아직도 방송에서 결정적인 장면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최근에도 추노 OST를 듣고 드라마 속 장면과 함께 추노꾼 모습으로 젖을 먹이고 아기를 어르고 달래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어 떠올랐다. 그러니 내가 망설임 없이 출산 드라마라고 칭하지 않겠는가......
다소 힘들고 외롭게 느껴졌던 첫 번째 출산과 두 번째 출산.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드라마 나부랭이에 몰입할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면 그래도 견딜만했던 건가…... 싶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셋째와 넷째는 출산 드라마가 없다. 그때도 계속 드라마를 봤고 재미있게 본 작품도 꽤 되지만 그때부터는 나에게 스마트폰이라는 단짝이 생겨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드라마를 가슴 졸이며 보지 않게 된 것 같다. 아니면 세 번째부터는 훨씬 해볼 만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셋째부터는 드라마 보다 말고 혼자 훌쩍이며 모유수유하는 일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평생을 기억할 출산 드라마도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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