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수 소동
06/19/23  

친구와 전철역 앞에 있는 한 식당에서 만났다. 김밥과 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다.

안동국시를 먹고 나오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 물통꼭지에 1회용 종이컵을 대고 물을 따르는데 뜨거운 물이 쏟아져서 깜짝 놀랐다. 물이 컵 밖으로 넘쳐흘렀다. 그런데 그건 물이 아니라 육수였다.

엎지른 육수가 밑에 쌓아 놓은 투고용 박스 위로 떨어졌다. 바로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내가 흘렸음을 알리고 육수를 닦기 위해 무릎을 구부리자 직원이 짜증스런 목소리로그냥 나가라고 했다. 내부가 협소한지라 내가 쭈그려 앉아 있으면 손님이나 직원들이 통행하는데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왔다. 직원인지 주인인지 한 사람이 박스 보따리를 들고 나와 나를 부르더니 박스값을 물어내라고 소리쳤다. 자기네가 4만3천 원에 산 것이라며.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고 무슨 큰 죄라도 진 양 몰아 세웠다. 식당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던 손님들을 비롯해 길 가던 사람들까지 큰 구경이라도 난 것처럼 호기심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다 물어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훼손된 것만 지불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보고 훼손된 것과 온전한 것을 헤아리라고 했다. 자기네가 바빠서 할 수 없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친구와 둘이 훼손된-육수에 젖은- 박스를 골라내니 7개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온전한 것 97개와 훼손된 것 7개를 구별하여 넘겨주었다. 내게 전달 받은 사람은 훼손되지 않았다고 넘겨준 97개 중에서 하나가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젖었다며 골라내었다. 그래서 못쓰게 된 것이 모두 8개가 되었다.

얼마를 지불하면 되겠냐고 물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다만 얼마라도 물어주고 싶었으나 거기서 돈 몇 푼을 꺼내 주는 것도 남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다시 와서는 육수를 쏟지 않도록 주의하겠다고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 어디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경험인지라 한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훼손된 것과 온전한 걸 구별했고, 그 결과 잘 해결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몇 가지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내가 실수를 알리자마자 종업원들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하기보다 먼저 짜증을 냈고, 음식점을 나서는 우리를 뒤쫓아온 사람은 대뜸 언성을 높여 자기가 4만3천 원에 구입했다며, 변상을 요구했다. 나를 마치 큰 죄를 저지른 범죄자로 취급했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자기 업소를 찾은 손님이 실수로 뜨거운 육수를 따르다 엎질렀다면 손을 데지 않았는지, 놀라지 않았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람이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물건 파손을 두고 짜증내고 목소리를 높여 변상부터 요구하는 건 비록 나의 실수로 말미암은 사태이지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이었다. 더구나 육수를 담아놓은 통에는 그 안에 든 내용물이 물인지 육수인지도 써있지 않았고, 뜨거운 육수가 들어있으니 조심하라는 안내 문구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짜증과 고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손님이 몰리는 점심시간에 음식 만들고 서빙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내 실수로 엎질러진 육수와 훼손된 투고용 상자를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밀려왔을 수도 있다. 또, 얼마가 되었든지 자신들이 구입한 상자 대금을 받아내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감정이 격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입장만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불쾌하고 무례한 언행을 보인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웃으며 이야기하고 엎질러진 육수는 닦아내고, 훼손된 박스는 그 값에 해당하는 만큼 변상 하고 받으면 되는 일 아닌가?

혹시 오늘날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무조건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고 신랄하게 비난하고 더 나아가 남의 잘못을 절대로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필벌(必罰), 좀 더 나아가 일벌백계(一罰百戒)주의의 단호함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그 일이 있고나서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