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1 딸이 소개팅을?
07/03/23  

"엄마, 친구한테 남자 소개받아본 적 있어?"
"응? 왜? 너 누구 소개받기로 했어?"
"응. A가 같은 반 친구 소개해준다고..."

A는 딸과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이다. 딸은 여중에 갔고 A는 남녀공학에 진학했지만 자주 연락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쩌지... 일종의 소개팅 같은 건가? 이제 경우 중1인데... 벌써부터 이성을 소개받고 그러나? 별의별 생각이 스쳐 지나가다가 '그래... 나는 어땠었지?' 하며 잠시 추억에 잠겨본다. 

정식 소개팅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딱 두 번 이성을 소개받았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인데 커플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두 명이 바로 떠올랐다. 심지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아득하지도 않다. 고작 몇 해 전 일 같기만 한데 그새 강산이 두 번 넘게 바뀌고 나는 나이 들고 이제 10대가 된 딸이 남자 소개도 받는다네?

첫 번째 소개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로 10학년(고1)무렵이었나 보다. 그때 나의 절친 두 명은 모두 교재 하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마침 그 두 명도 서로 친한 친구였다. 그들에게 또 다른 친한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학교 댄스파티를 앞두고 함께 할 파트너가 없다며 나에게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친구들과 놀러 가는 기분으로 가면 된다고 했고 아무리 캐주얼 댄스라지만 나름 댄스파티인데 어떻게 부담이 없겠나... 친구들이 저마다 본인의 파트너와 춤을 추고 있을 때 나는 어색하게 그 친구와 마주 보고 있어야 했다. 그는 수줍음이 많은 재미교포 2세로 내가 농담이라도 던지면 하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곤 했다. 우리는 춤을 추는 내내 서로의 발을 밟고 어색한 분위기에 멋쩍은 미소만 짓다가 결국 노래 한 곡을 채 끝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몇 번 더 그를 만나긴 했지만 이성 관계로는 진전되지 않았다. 

두 번째 소개. 한때 아는 언니를 따라 헬스장에 다녔었다. 이 언니는 사실 나의 친오빠의 전 여자친구였는데 오빠와는 얼마 못 가 헤어졌지만 나를 귀여워해서 우리끼리 종종 만나고 연락하는 사이였다. 그 당시 언니가 만나는 남자가 헬스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헬스장에 다른 한인 매니저가 나를 좋게 봤다며 연락처를 물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정식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던 나였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연락처를 줘도 좋다고 했고 우리는 몇 번 만나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공원도 산책했다. 나보다 서너 살쯤 위였던 그는 고3이었던 내가 봤을 때 듬직하고 능력 있는 남자였지만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던 모양이다. 특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그가 팔을 내 어깨에 얹고 싶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모습이 웬일인지 너무 꼴 보기 싫어서 일부러 등을 의자에 기대지 않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그런 그의 모습이 순수하지 못한 것 같아 안 좋게 봤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완전 순진무구 그 자체네? 

여기까지는 내가 소싯적 소개받았던 남자들에 대한 다소 시시한 기억들이고 이제 우리 딸의 세상이 펼쳐지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딸은 6학년때부터 부쩍 이성에 관심이 많아진 것 같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든가, 누구랑 누가 사귄다, 남자들은 이렇다 저렇다 하는 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이번에 친구에게 이성친구를 소개받는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뭔가 살짝 들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딸 앞에서는 애써 쿨한 척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경청해 줬지만 복잡 미묘한 심정이 되었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했다가는 10대 딸이 엄마에게 영원히 입을 닫아버릴 것만 같아서 최대한 별 말 하지 않았을 뿐 뒤돌아 안방으로 와서는 남편 앞에서 "어떡해 어떡해~ 우리 딸이 남자를 소개받는다니!!! 이제 겨우 열세 살인데... 왜 그렇게 빠르지? 누구 닮아서 그러지? 난 안 그랬는데?"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미 키가 나만큼 커버린 딸이지만 이성친구에게 관심을 갖는 딸의 모습은 뭔가 아직 익숙하지가 않다. 애석하게도 나는 쿨한 요즘 엄마로서의 자격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응원한다. 10대에 사랑이 인생에 어떤 의미로 남을지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가슴 콩닥콩닥, 바람처럼 나비처럼 간지럽고 설레는 순수하고 달콤한 경험을 충분히 해보았으면 하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오래오래 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켜켜이 쌓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아이는 단단하고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여 내 곁을 떠나 훨훨 날아가겠지. 그때까지 나는 쿨한 엄마 코스프레를 지속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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