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한 장
09/11/23  

처서의 끝자락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다소 선선해진 기온, 푸른 하늘과 여전히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바닷속에서 만나는 멸치 떼처럼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무리를 이루며 병원에 드나든다. 어디 아픈 곳이 있어 병원을 찾은 건 아니지만 병원 방문은 백화점 방문처럼 반갑지만은 않다.코로나도 끝물이라 이젠 코로나에 걸려도 직장인 유급 휴가도 없고 마스크 착용도 실내외 구분 없이 권고이지 의무가 아니다.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안 쓴다고 실랑이하고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고 신고도 가능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진짜 격세지감을 느낀다. 

여전히 코로나는 변종을 쏟아내며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제도나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여 코로나의 대한 대응방식은 180도 달라졌다. 마스크 없이 외출이 불가했던 시절, 마스크를 깜빡하고 나왔다가 다시 집에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요즘은 '아 맞다. 마스크!' 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심지어 현관문이 아직 닫히지 않았는데도 되돌아가지 않고 그냥 갈 길을 재촉하기도 한다. 마스크 잔량 표시를 해주고 뛰어가서 기다리다 사 오고 해외에서 직구도 해서 모셔오던 마스크의 뉴 노멀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스크를 쓰는 곳이 바로 이곳, 종합병원인데 하필이면 이 날따라 마스크를 깜빡하고 말았다. 내 앞에 할머니 한 분도 비슷한 사연으로 병원 입구에서 직원과 실랑이 중이었다. "내가 깜빡해서, 잠시 화장실만, 다리가 아파서" 등등 다양한 시도에도 틈이 없었다. 빙 둘러 사거리에 가시면 편의점에서 판단다. 분명 내 실수임에도 왜 이리 야속해 보이던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내가 다가가자 병원 직원의 눈이 커지며 다가온다."마스크 쓰셔야 합니다." 바로 앞에서 할머니가 입구컷 당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불필요한 시도는 하지 않기로 한다. "네. 어디서 구매하죠?" 위치 설명을 듣고 뒤돌아서는데 어떤 남성이 "저 따라오세요. 차에 마스크 있어요." 하신다. 이 종합병원은 이른바 국내 빅 5 대형병원으로 인근 약국으로 환자를 실어 나르는 차들이 즐비한데 아마도 약국 픽업 차량인 것 같았다. 약국 차량들은 병원 내 불법주차는 기본이고 다소 요란스러운 호객 행위로 종종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내가 그들의 호객을 반길 줄이야. 참 인생 모를 일이다 하며 따라 걸어가는데 옆으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한 분도 같이 속도를 맞추며 따라붙는다. 아마도 약국 차량에 탑승하시려는 모양이었다. 

아주머니 차림새를 보니 머리에 쓴 두건과 두건 속으로 비치는 민머리가 항암치료 중이 아니신가 싶었다. 병원 입구에서 나와 주차장을 지나면 맞은편으로 약국 승합차들이 한 줄로 쫙 주차되어 있다. 근데 앞서서 걸으시던 약국 기사분이 앞길로 안 가고 오른쪽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꺾으신다. '엥? 약국차가 주차장에도 주차를 하나?' 하며 의아해하며 따라가는데 기사분이 갑자기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뭐지?' 하면서 잠자코 들어보니 내 이야기인 것 같다. "마스크를 사러 가려면 한참을 빙 둘러가야 하는데......" 모든 내용이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저 사람이 마스크가 없어 낭패니 우리가 한 장 주면 좋을 거 같다 대충 그런 내용인 것 같았다.

목적지에 이르렀는데 예상했던 승합차가 아니고 포터다. 포터는 한국인들이 애용하는 생활형 트럭으로 개인사업자나 농업 등 다양한 사업군에서 사용이 가능해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미국의 픽업트럭처럼 말이다. '어 왜 승합차가 아니지?'라고 생각하다가 바로 의문이 풀렸다. 약국 기사인 줄 알았던 그분은 알고 보니 나와 함께 걸어오시던 아주머니의 남편이셨던 것이다. 아내와 진료 혹은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마스크에 우왕좌왕하는 나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마스크를 주겠다며 따라오라 하신 것이었다.

정신없이 나오느라 깜빡한 마스크 한 장 때문에 병원 입구에서 제지를 당하자 내심 짜증이 나있었다. 그런 와중에 병원 치료를 받는 환자와 보호자임에도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부부를 만나니 내 마음에 경종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매일 조바심 내며 쫓기며 사는 나에게 마스크 한 장의 호의는 내가 지금 갖지 못하는 여유처럼 느껴졌다. 나는 연신 허리를 굽히며 오래간만에 세상 살맛을 보여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귀한 마스크를 쓰고 다시 병원으로 향하는데 어느새 마음이 따뜻해지고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늘이 푸르고 바람이 좋은 아직은 따뜻한 2023년 처서의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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