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사진은 추억을 싣고
10/02/23  

요즘 포토 애플리케이션 중에 AI 이어북(졸업앨범) 상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데 AI 기술로 실제 인물 사진을 90년대 미국 이어북(졸업앨범) 사진으로 변환해 생성해 주는 것이다. Epik이라는 포토앱에 실제 자신의 사진을 올리면 무려 60개나 되는 90년대 느낌의 미국 졸업앨범 프로필 사진을 만들어주는데 무료는 아니고 유료 서비스이다.

국내 유명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본인의 이어북 합성사진들을 SNS 올리면서 이슈가 되었는데 유재석, 이효리, 백종원 같은 스타들은 물론이고 SK 그룹 최태원 회장까지 동참하였다. 유료 서비스라 망설였지만 결국 나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구태여 돈을 들여 그 서비스를 이용해 보았다. 60장이나 되는 합성 사진은 딱히 쓸모가 없었지만 아주 조금 나를 닮은 듯한 가상의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잠시 옛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잠깐동안 '아... 내 돈 써서 이런 한심한 짓을 하다니...'하고 후회하기도 했지만 해물 칼국수 한 그릇 값으로 잠시 추억여행 다녀온 셈 치기로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졸업한 내게도 이어북이 있다. 사실 후덕한 아줌마처럼 나온 내 사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졸업 이후 별로 꺼내본 적이 없어서 지금도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다. 사진이란 자고로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적어도 실물보다 조금은 예뻐 보여야만 어느 정도 만족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너무 실물에 가까우면 '정말 사실적으로 그렸구나.' 하면서 감탄하기보다는 나의 못난 단점들만 눈에 들어와서 묘하게 불쾌해진다. 암튼 신기하게도 졸업앨범 사진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봤을 때도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미국식 프로필 사진, 스튜디오 인물 사진들은 특유의 조명, 배경과 컬러가 주는 묘한 느낌이 있다. 그래서 90년대 졸업앨범 사진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매학년마다 찍었던 학교 사진들도 모두 그 촌스러움을 지니고 있다.

이 촌스러운 미국 학교 프로필 사진의 최악은 바로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 사진사가 입을 벌리고 활짝 웃기를 종용하기 때문에 입 벌리고 활짝 웃는 것에 취약한 동양인들은 모두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 사는 내내 이런 상황에 익숙했던 나는 첫째가 학교에 입학하고 첫 학교 사진을 찍는다고 했을 때 몇 날 며칠 아이에게 자연스럽게 웃기를 연습시켰다. "눈에 힘 풀고 즐거운 생각을 하면서 그냥 웃어봐~ 입꼬리만 억지로 올리지 말고~ 차라리 그냥 웃어~" 하지만 매번 사진 속 아들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울상에 입만 웃고 있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매 학년마다 찍게 되는 학교 사진은 구매를 원하면 주문할 수도 있었는데 샘플 사진을 받고 나면 '아휴! 이걸 꼭 사야 하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다시 보니 그런대로 귀여운 맛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사진사에게 따지고 싶을 정도였던 것 같다.

내친김에 내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꺼내 봤다. 미국 학교의 졸업앨범은 꽤나 고가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교사와 졸업생들뿐만 아니라 전 학년, 교내 행정실 직원이나 관리인들의 사진까지 있고 각종 부서 활동 사진, 그 해의 행사 사진, 부모님과 가족들의 졸업 축하 메시지, 졸업생들의 문학, 예술 작품 등등 꽤 두꺼운 한 권에 수많은 사진과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졸업앨범만 잠시 훑어봐도 내신 관리와 입시 준비에 치여 즐기지 못하는 대한민국 고등학생들과 달리 미국 고등학생들은 꽤나 버라이어티 한 학창 시절을 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영어가 취약하다는 핑계로 학교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지 않고 주로 한인 친구들과 어울리며 조용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그 점만큼은 두고두고 후회되는 것 중 하나이다. 열성적으로 학습에 임하지 못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겠는데 능동적으로 학교 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만큼은 참 후회스럽다. 영어 좀 못하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외향적인 성격을 숨기고 조용한 학생으로 학교를 오갔는지 말이다. 학창 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이라 그때 더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은 평생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다.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들만큼은 다양한 스포츠도 접하고 악기도 하나씩 연주해서 콘서트 무대에도 올라가고 합창단이나 학교 기자로도 활동하며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으면 했는데 한국으로 오면서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벌써부터 입시지옥의 문이 열리는 게 보여서 너무 끔찍하고 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야 할지 막막해진다. 자식은 그냥 믿고 지켜봐 주면 알아서 잘 큰다는 것은 어디 애 안 키워본 노처녀 상담사가 했을 법한 소리! 잘된 아이들 보면 죄다 알게 모르게 뒤에서 부모가 엄청나게 공을 들이고 애를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나저나 돈 주고 얻은 합성 졸업사진 덕분에 90년대로 추억여행을 갔다가 결국은 현실로 돌아와서는 자식 걱정으로 마무리... 역시 중년 아줌마, 엄마의 의식의 흐름은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아... 너무 뻔하고 재미없지만 이게 바로 "오늘의 나", 진짜 나의 프로필이라는 것을 깨닫으며 조용히 추억의 졸업앨범을 덮는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