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물 처리기 사용기
01/22/24  

살림 자체에 별 흥미도 재능도 없는 편이지만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은 가사노동 중 유독 싫다. 40년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한국에 와서 처음 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래 후각이 발달해서 비위가 약한 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음식물을 처리하는 일은 얼마나 번거롭고 귀찮은가? 먹다 남은 치킨 살과 뼈를 분리해 본 사람을 알 거다. 배수구에 착 달라붙어있는 손으로 잘 잡히지도 않는 파, 부추 같은 잔 건더기를 건져내는 건 또 얼마나 끔찍한가? 아, 눌어붙은 치즈도 만만치 않지. 

한국에 오니 우리 아파트는 1층에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이 있고 입주민들은 개별 카드를 이용해서 그곳에 음식물 쓰레기(음쓰)를 배출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나오는 음쓰를 버리기 위해 쓰레기를 들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4층을 내려가서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한다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여름과 한겨울 비가 오고 눈이 올 때는 또 어떤가? 정말 이게 최선인지 의심스러웠다. 전 국민, 온 나라가 이러고 있으니 이게 최선이겠지 싶었지만 정말 곤욕스러웠다. 그래서 남편에게 내가 이것만은 못하겠다고 했고 남편은 몇 번 음쓰를 버리더니 얼마 안 가 이 업무를 큰 아들에게 이임했다. 그렇게 큰 아들이 3년, 그리고 바통을 이어받아 둘째인 딸이 3년간 음쓰 배출을 담당해 왔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 날짜가 잡힌 것이었다. 기간은 무려 6주간으로 엘리베이터 없이 음쓰를 버리러 다닐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져서 결국 미루고 미뤘던 음식물 처리기를 장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단 주변에 음식물 처리기를 갖고 있는 지인들을 토대로 모델별 만족도를 조사했다. 단점을 꼽지 못할 정도로 대부분 매우 만족하고 있었다. 

구매가 임박해지자 남편은 친환경 음식물 처리기인 미생물 방식을 강력히 추천했다. 제품을 살펴보니 음식물 처리를 위해 내부 미생물을 잘 키워내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친구의 시부모님도 몇 번 사용하시더니 너무 어렵다며 구석으로 치워두셨다고 했다. 톱밥 같은 형태로 잠들어 있는 미생물에 적당한 물과 적절한 음식을 주어 흙과 같은 상태로 활성화시키는 방식인데 이 미생물들에게 너무 기름진 음식이나 너무 맵고 짠 음식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한국인은 고춧가루, 고추장, 된장을 기본양념으로 사용하는데 이걸 배출할 수 없다면 이게 무슨 무용지물인가? 미생물 방식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 키우듯 음식물을 물로 씻어낸 후 배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더 이상 나는 뭔가를 키울 수 없다. 아니 키우고 싶지 않다. 남편에게 "제발!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키우고 싶지 않아. 지금으로 충분해." 애원하다시피 했고 남편은 나의 반대를 탐탁지 않아 했으나 지금도 나는 백 번 천 번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신한다. 

설치형 분쇄 건조형 처리기도 좋아 보였다. 금액은 제일 높았지만 일단 설거지하면서 음쓰가 곧바로 배수구로 투입되는 형식이라 따로 음쓰를 운반할 필요 없다는 것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투입구가 다소 좁기도 하고 설치형인데 혹시 고장이라도 나면 뭔가 더 복잡하고 골치 아플 것 같아서 불안함이 컸다. 

결국 한참을 검색하고 조사하고 비교 분석한 끝에 처리기를 구매했고 두 달가량 사용 중이다. 결론적으로 이제 음쓰 버려달라고 사춘기 자녀들 눈치 보며 부탁할 필요가 없어져서 매우 다행이다. 시기적으로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된다. 우리 딸은 윤석열 대통령 대선 후보시절, 음식물 쓰레기 배출 간편화를 위해 음쓰 분쇄기 설치를 환경 공약으로 제시하자 반드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음식물 처리기가 도착하자마자 지난 3년간 음쓰 배출을 도맡아온 딸이 제일 좋아할 줄 알고 "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농담이었음. 크리스마스 선물은 따로 했음) 했더니 이내 딸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곧 있으면 셋째에게 물려줄 업무이기도 했는데 동생들은 앞으로 영영 음쓰 버릴 일이 없어졌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요즘 다른 업무에서 많이 열외 시켜주고 있는데 우리 딸이 그걸 알려나 모르겠다. 

 하지만 웬일인지 내 일은 더 많아진 기분이다. 그동안은 솔직히 아이들 시키느라 눈치 보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면 이제는 음식물 처리기를 가동하고 분쇄/건조되어 가루가 된 음쓰를 폐기하고 처리기 내부 통을 불리고 닦는 일을 매일 반복하게 되었다. 전적으로 내가 하는 일이다 보니 분명 편리 해진 것 같기는 한데 나만 뭔가 업무가 늘어난 느낌이랄까? 연봉은 안 올랐는데 업무만 추가되었다고 툴툴대는 MZ 사원 같나? 집에서 음쓰를 처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음식물 처리기는 훌륭한 제품이지만 아직도 발전시킬 구석이 매우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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