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서 후퇴하다
02/12/24  

아이들 치과 정기점검 할 때가 되어 겨울방학을 이용해 셋째, 넷째를 데리고 치과에 다녀왔다. 초 6 셋째는 별 문제가 없어서 양치질만 조금 더 신경 써서 하라고 하고 통과. 초 3 넷째는 충치 방지를 위해 치아에 불소를 도포하고 충치도 2개 있어서 오후에 다시 와서 레진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알겠다고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조무사가 다급하게 내게 다가왔다. 치아에 불소를 도포하던 중 30초만 더 하면 되는데 아이가 입을 다물고 협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애 넷을 치과에 데리고 다녀봤지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불소 도포는 영유아 때부터 해왔던 것으로 넷째도 처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로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는 이미 얼굴이 벌게져서는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대답 대신에 입을 꼭 다물고 더욱더 서글피 울기 시작했다. 조무사와 직원이 두세 명씩 달라붙어서 아이를 달래 보겠다고 노력했지만 멈출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울기만 하니 답답해서 고구마 백만 개 먹은 것 같은 상황이 되었고 더 이상 치과에 민폐를 끼칠 수 없어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치아에 불소를 도포하는 것은 전혀 아픈 치료가 아닌데 대체 왜 그래? 충치도 두 개나 생긴 것은 네가 음료수며 군것질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것이니 앞으로 단 것 좀 그만 먹어. 네가 관리를 잘 못해서 치료를 받게 된 것인데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치과 선생님들도 힘들고 엄마도 힘들어."라고 나만 쉬지 않고 계속 떠들며 집에 돌아왔다. 육아대통령 오은영 박사님이 이 모습을 봤다면 아이의 감정 먼저 살펴주지 않는 나쁜 엄마라며 혀를 끌끌 차셨겠지. 

아이가 점심을 먹는 동안 혼자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으로 머리가 아파왔다. 치과에 대한 공포는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다 큰 성인도 충분히 공감하는 부분이긴 하다. 나조차도 치과에서 사용하는 모든 도구들에 강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앞에 나 혼자만 누워서 입을 벌리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불안하고 불편한 일이기에 병원 중에서도 치과는 여러모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첫째를 데리고 처음 치과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곱 살이었던 아이의 앞니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이미 영구치가 밀고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덧니라도 되면 어쩌나 겁이 덜컥 나서 발견하자마자 아이를 데리고 부리나케 치과로 달려갔다. 유치가 아직 많이 흔들리지 않아서 아이가 조금 힘들어 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발치를 하겠냐고 의사가 물었다. 그 당시 나는 영구치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 때문에 겁에 질려 있었고 오늘 무조건 발치를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날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있던 일곱 살 첫째가 그토록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치과에서 나와 아이가 좋아하는 초콜릿 쿠키도 사주고 그 어느 때보다 폭풍 칭찬을 해주며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렇게 우리 집 아이들은 그동안 단 한 번의 저항이나 문제없이 치과치료를 잘 받아왔다. 치과에서 울며 난동을 부려 웃음가스를 흡입시켰다던가 손발을 묶고 치료를 해야만 했다는 이야기들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남의 집 일이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내 아이가 치과 치료를 포기하고 후퇴하다니 말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심정으로 막내 점심을 챙겨 먹이고 아이에게 그래서 오늘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뭘 묻냐는 표정으로 당연히 충치 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갈 것이라고 했다.  "너 아까 별로 아프지도 않은 불소 도포 30초도 못 견디겠다고 하고 나왔는데 충치 치료를 할 수 있겠어? 마취 주사도 맞고 해야 하는데.""응. 할 거야.""진짜야? 이번에도 못하겠다고 하고 나오면 곤란해.""응. 알아."

다시 아이 손을 잡고 치과로 향했다. 모든 치과 직원들의 염려 어린 눈길을 받으며 아이는 다시 베드에 누웠다. 그리고는 마취주사를 포함해 모든 치료를 마칠 때까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잘 버티고 걸어 나왔다.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받아들였더니 생각보다 괜찮았던 모양이다. 나중에 몇 번이나 그때 왜 치료를 중단하고 울었던 것이냐고 물었는데 정말 마취 주사나 충치 치료보다 불소 도포하는 게 더 아프고 불편했다고 한다. 치과에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했지만 아이가 그렇다니 그런가 보다 할 수밖에 없다. 

아이 넷을 키우며 이따금씩 나 자신이 나름 베테랑 양육자이고 산전수전 다 겪어서 웬만한 것은 잘 놀라지도 않으며 뛰어난 대처 능력과 응용력을 지녔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대단한 오착이다. 그럴 때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정신 바짝 차릴 수 있게 하나씩 하나씩 일이 터진다. 아무리 네 번째여도 아이 넷이 다 다르고 그때그때 상황도 다르니 내가 구축한 데이터로도 어쩔 수 없을 때가 더 많다. 그럴 땐 그저 잠시 숨을 고르며 후퇴하고 기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10년을 쉬지 않고 꾸준히 해도 잘하기는커녕 종잡을 수조차 없는 게 아이를 키우는 일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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