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친구와 걷고 나서 체조시간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공원의 아침이 펼쳐지고 있었다. 새들이 노래하고 나뭇잎은 조금씩 더 푸르러지고 있었으며 그 너머 파란 하늘에는 흰 구름들이 뭉게뭉게 어울려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공원 여기저기에서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어르신들로부터 어젯밤에 91세의 어르신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망자(亡者)는 식욕이 없어 음식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의사는 호스를 통해 직접 음식을 위장 속으로 주입하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했으나 망자와 가족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음식을 억지로 배속으로 넣는 방식보다는 몸이 하자는 대로 맡기기로 한 것이다. 결국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니 영양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 않아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약물이나 의료기구의 도움을 받으면서 수명 연장을 꾀하지 않았으니 진정으로 천수(天壽)를 누린 셈이다.
살아 있는 생명은 언젠가는 소멸한다. 이 자연의 대법칙을 인간도 피해 갈 수는 없다.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모든 인간도 죽는다. 그러나 죽음은 인간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죽음이 어떤 것이라고 말해 줄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미스터리이다.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고 공포심이 생길 정도로 두려운 대상이다.
우리 앞에 펼쳐진 삶이 풍요롭고 화려할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비례해서 커진다. 반대로 삶이 힘들어질 때, 삶에 대한 욕구가 사라질 때, 죽음은 마지막 도피처로서 인간을 유혹하기도 한다. 안락사나 존엄사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으며, 자신의 삶 속에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판단 하에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는 삶과 죽음을 양면성을 지닌 삶의 본질로 설명한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으로 다시 삶이 가능하도록 순환하는 영원한 우주의 섭리라고 주장한다. 종교가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가르치건 우리의 마음속에 죽음이란 개념은 여러 가지 삶의 형태처럼 각각의 다른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의 예수는 인간에게 영원한 고뇌이자 숙명으로 남아 있는 죽음을 극복하고 인류에게 횃불처럼 타오르는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다시 산다는 소망이 없다면 기독교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부활은 엄청난 사건이자 커다란 메시지이다.
2024년 부활절을 보내면서 각자 죽음에 대해 자신이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짚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아무리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인간 운명의 연장선에 있으므로 둘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을 유한한 생물학적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서 펼쳐지는 내면의 현상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살아 숨쉬면서 삶에 대한 감사와 각성이 없다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죽은 것 같은 의미 없는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것은 삶 속에서 거듭나는 것이다. 옛 것이 죽고 새 것이 살아났다는 기독교의 메시지도 강렬하고 장엄한 인간 영혼의 부활에 대한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부활이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살고 죽는 것, 그리고 다시 산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밤새도록 깊은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일종의 작은 부활을 경험한다. 그 깊은 잠에서 다시 깨어 새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아침에 깨어나서 새날을 맞이하는 것 자체가 부활이요 기적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부활의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다. 밝아 오는 새 날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삶의 기회를 부여 받는 매일 매일의 기적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야말로 ‘모닝 미라클’이다.
이처럼 하루하루의 삶 속에 부활의 메시지가 살아 숨 쉬고 있다. 흘려보내듯 매일 무심코 살아가는 일상 속에 삶과 죽음은 끝없이 교차하며 우리에게 도전한다. 한 번 살고 한 번 죽는 인생을 크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매일 매일의 작은 삶이 모여 한 번의 인생이 된다는 진리를 간과할 수 없다.
책임 없이 무의미하게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이 하루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은 그냥 흘러 보낼 수 없는 엄청난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머리 숙여 고인의 영면을 기원한다.
안창해. 타운뉴스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