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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하던 날
05/06/24  

남자들은 참 번거로울 것 같다. 장발이 아닌 이상에 한 달에 한 번은 이발을 해야 하니 말이다. 아들을 셋이나 낳고 나니 이발의 번거로움을 어느덧 나도 함께 절감하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들의 덥수룩한 머리를 잘 견뎌내지 못하고 나도 그중에 하나이다.

초등학교 4학년 막내의 머리가 덥수룩해졌다. 자고 일어나면 제멋대로 까치집이 생겼고 앞머리는 급기야 눈을 찌르기 시작했다. 5월인데도 한낮의 기온이 최고 28도까지 올라가니 태권도장에 갔다 오면 머리가 홀딱 젖어서 귀가하는 날도 있어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다. 이제 중1 아들은 엄마 없이 미용실을 다니게 되어 참 편해졌는데 막내도 이제 몇 년 남지 않았구나. 

오늘 오후, 피아노 학원 마치고 나오는 아이를 학원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후 5시 반이었는데 아직도 제법 태양이 뜨거웠다. 5월 초가 원래 이렇게 더웠던가…... 어리둥절한 더위다. 땡볕에 서서 5분여쯤 기다렸을 때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학원 건물에서 나왔다. 

아이 손을 잡고 우리 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남성전문 커트클럽으로 향했다. 현금가 만원이면 샴푸 없이 그럭저럭 봐줄 만한 커트를 해주는 곳이었다. 문을 열었더니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손님이 커트를 하고 있었다. 이 정도 대기면 나쁘지 않다. "지금 남자아이 커트 되나요?" "저희 아이는 안 받아요." 문을 닫고 나오면서 가장 최근 막내가 이곳에서 머리를 잘랐다는 사실을 깨닫았지만 다시 문은 열고 되물을 기분은 아니었다. 우리 동네에 미용실이 어디 이곳 하나인가? 우리 동네는 미용실이 제법 많다. 건물마다 미용실 하나쯤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우리 집에서부터 큰 사거리까지 도보 7-8분 거리인데 직선길에만 미용실이 7개 정도 있다. 

뙤약볕을 걸어 다음 미용실 문을 빼꼼 열었다. 체구가 큰 여자 원장이 여자 손님 헤어 스타일링 중이었다. "지금 남자아이 커트 되나요?" "저희는 예약 안 하시면 못하세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대답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다시 나타난 미용실, 이곳은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데 힐끔 들여다보니 손님이 없다. 대기 없이 바로 커트가 가능하다. "우리 그냥 여기 가자. 바로 가능하겠다.""싫어. 그냥 원래 가던 ‘가위든 남자’ 갈래.""너 거기 별로 안 좋아하잖아. 거긴 대기 있을 수도 있어. 그냥 여기 가자.""싫어. 여긴 안 갈래.""왜?""그냥…... 새로운 데는 가고 싶지 않아."날도 덥고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나의 한숨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아이의 고집대로 ‘가위든 남자’로 향했다. 이곳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지만 말도 못 하게 지저분하다. 바닥은 머리카락으로 뒤범벅되어 있고 빗과 헤어드라이어 등 각종 도구들이 딱 봐도 생전 닦지 않은 모양새였다. 비염이 심한 남자 원장은 쉴 새 없이 킁킁거리는데 머리를 만지는 손길이 너무 거칠어서 보고 있으면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막내도 여기 올 때마다 아프고 힘들었다고 호소했는데 막지막으로 왔을 때는 다시는 여기서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말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몇 달 만에 여길 다시 돌아오다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지금 남자아이 커트 되나요?" "네. 금방 돼요."중년 여성 손님 샴푸 중이었는데 딱 봐도 30분각인데 금방 된단다. 하지만 다시 나가서 미용실을 찾아다닐 기운은 없다. 아직 한두 곳 남아있고 골목까지 찾아다니면 더 많지만 그곳이라고 바로 커트가 가능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대기하기로 한다. 

내 표정이 좋지 못해 보였는지 막내는 얼른 책가방에서 숙제를 꺼내 뭔가를 긁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20여분을 기다렸다. 덥기도 덥다. 오늘 최고기온 28도였는데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틀지 않고 뜨거운 드라이 바람까지 부니 그 좁은 미용실 안이 찜통 그 자체다. 내가 한숨을 쉬자 막내가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더니 작게 말한다. "엄마, 아까 거기 다시 갈까?" 손님이 없던 그 미용실을 말하는 모양이다. 자기 고집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생각보다 기다림이 길어지고 엄마의 표정이 좋지 못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신경도 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20분을 기다렸는데 나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결국 그렇게 집에서 나온 지 50분 만에 아이의 헤어컷이 시작되었다. 10분도 안 걸리는 머리 손질을 받기 위해 50분을 헤맨 것이 억울했다. 동네에 미용실이 이렇게나 많은데 막상 머리 자르려고 나가면 왜 갈 곳이 없는가? 마치 냉장고는 꽉 차있는데 먹을 게 없고, 옷장은 꽉 차있는데 입을 옷은 없는 모양새다. 이럴 때 막상 입고 싶은 옷은 아무리 찾아도 안 나타나지......
 
그래도 엄마 기분을 살펴주는 막내의 예쁜 마음 덕분에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게다가 머리를 마치고 나왔더니 뜨겁던 태양도 한풀 꺾여 공기가 많이 시원해진 터였다. 아이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 할인점에서 아이스크림도 잔뜩 사서 집으로 향했다. "엄마, 오늘 많이 바쁘고 힘든 하루였지? 내가 집에 가서 마사지해 줄게.""그래 고마워. 아까 너무 더워서인가 힘들어서인가 엄마가 짜증내서 미안해."꼭 잡은 막내의 손이 귀엽게 끈적였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초여름 이른 저녁의 공기와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오늘 처음으로 나는 행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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