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속 모래
08/19/24  

금요일 저녁 남편과 데이트 약속을 하고 나갔다.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레스토랑이었다. 식당이 그리 크지 않은데 절반은 오픈 키친 공간이고 절반은 여러 개의 테이블을 붙여 대형 테이블로 만들어 모든 손님이 함께 앉아야 하는 형태였다. 두 명의 셰프가 주문, 요리, 서빙을 맡고 손님들은 요리하는 셰프의 손길을 직관하면서 요리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요리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높여주고 있었다.  

식당 테이블과 의자는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지만 뭔가 실용적으로 공간을 활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뉴를 훑어보니 모든 요리들은 합리적인 가격대로 책정되어 있고 음료나 주류도 모두 적당한 가격이어서 이 정도면 부담 없이 다음에 또 방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 집의 시그니처라는 수비드 스테이크, 페스토 리조또, 알리오올리오 파스타, 그리고 나는 레드 와인 한잔, 남편은 콜라를 한잔 주문했다. 요리들은 최상이라 할 순 없지만 이 가격대에 이런 맛과 이런 디테일이라면 충분히 훌륭하게 느껴졌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그런 레스토랑이었다.  

식당에는 중년 여성 네 명이 앉은 팀, 남녀 커플, 그리고 우리 맞은 쪽에는 이십 대 아가씨들이 앉아 식사를 했다. 맞은편에 앉은 아가씨들은 직장 동료인지 그리 친한 사이 같아 보이진 않았다. 회사 업무에 대한 이야기, 회사 사람들 이야기를 나누며 이따금씩 어색하게 웃었다. 옆에 앉은 커플은 시장했는지 아니면 다른 일정이 있었는지 식사를 하고 빨리 일어섰다. 우리보다도 먼저 와있었던 중년 여성 네 명은 식사를 마치고도 한참을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고 우리가 식당을 떠날 때까지도 자리를 지켰다. 아마도 인근에 사는 주부들로 모처럼 금요일 저녁 기분을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절반쯤 먹었을 때 남은 좌석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딸과 엄마, 아빠 이렇게 세 사람이 들어왔다.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었고 다 큰 딸이 금요일 저녁, 부모님과 함께 식사하러 나왔다는 것이 괜히 더 좋게 보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엄마의 언성이 높아졌고 엄마와 딸 사이에 불편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너는 꼭 말을 그렇게 해야 하니?"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격앙되어 몹시 떨고 있었다. 아빠가 "당신은 왜 그렇게 크게 말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무슨 마이크 대고 말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며 주위를 의식했다. 나는 의식적으로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들의 대화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엄마가 몇 마디를 더 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딸이 "왜 여기까지 와서 그래…..."라고 말했지만 엄마를 멈추지는 못했다. 

엄마가 울면서 식당을 나가버린 후에도 아빠와 딸은 남아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슬쩍 보니 심지어 딸은 꽤나 맛있게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아빠는 나름 두 사람 사이에서 중재하려 노력하는 듯했고 딸도 혼란스러운 마음이었겠지만 그래도 식사도 못한 채 울면서 나가버린 엄마만 하겠는가...... 난 왜 그렇게 엄마가 딱하게 느껴지던지...... 이상하게 감정이 이입되는 것은 나도 엄마여서 그런 건가? 자꾸만 엄마에게로 마음이 쓰였다. 

식당에 남은 부녀가 나누는 대화가 언뜻 들려왔는데 이 모든 싸움의 발단은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닌 듯했다. 엄마가 식당에서 울면서 나갈 정도면 뭔가 대단한 충격 발언 정도는 있었을 법 하지만 그런 일이 아니었다. 딸이 한참 동안 엄마에게 섭섭한 것들을 토로했는데 지극히 일상적인 내용이어서 솔직히 지금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들으면서 '어라? 겨우 이런 것들이었어? 난 또 뭐 만나면 안 되는 사람을 만난다든가…... 엄마 뒤통수를 치고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든가…... 그런 건 줄 알았네.' 싶었다. 

들어보면 엥? 대단한 일도 아니네? 뭐 이런 일로 그렇게까지 심각할까 싶기도 하지만 나를 불편하게 하고 괴롭히는 일들도 언제나 별일이 아닌 소소한 것들이다. 내 자식이 눈만 좀 이상하게 떠도 신경이 쓰이고 말의 뉘앙스, 토씨 하나에도 혈압이 상승하고 별일도 아닌 일에 부르르 떨었다가 뚜껑이 열렸다가 난리법석이다. 결국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것도 즐겁게 하는 것도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소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미국의 유명한 권투선수였던 무하마드 알리는 이렇게 말했다. "눈앞의 올라야 할 산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신발 속에 들어간 자갈 때문에 힘든 것이다."  

저 멀리 거대한 산에 지레 겁먹지 말고 내 신발 속 모래부터 잘 털어내야겠다. 오늘 눈물을 훔치며 식당을 나선 그 어머니의 신발도 조금은 가볍고 편안해지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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