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미국에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좋았던 것들이 참 많지만 그 중에서도 몇 가지만 손꼽아야 한다면 이것만은 말해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집 앞 호프집에서 생맥주 한잔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친구가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고 단톡방에 올렸더니 다른 친구가 집 앞 호프집에서 맥주 한잔 하자고 했고 순식간에 멤버가 구성되어 단 10분 만에 집 앞에서 만났다. 옷을 갈아입거나 치장을 할 필요도 없다. 화장기 없는 민낯에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가도 괜찮다. 집에서 도보 5분 거리 치킨을 파는 동네 호프집이니깐......
금요일 저녁이라 호프집은 동네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족들끼리 치킨 먹으러 온 테이블, 직장동료들끼리 퇴근 후 몰려온 테이블, 운동 마치고 시원하게 맥주 한잔 마시러 온 테이블 등등 정말 다양한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는 기분이었다. 그래!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하면 우리 동네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시끄러운 곳은 바로 이곳이다.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앉으면 익숙한 직원들이 다가와 주문을 받고 익숙한 메뉴를 보며 주문을 한다. 모든 것들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첫 모금의 맥주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시원해서 하루의 더위, 짜증, 그리고 피로까지 확 씻어내 주는 것만 같았다. 맥주 한 잔씩 다 비우고 나자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간 우리들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최근에 있었던 재미난 에피소드, 고민거리, 가족 이야기, 힘들었던 일,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가고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테이블 위에는 달고 짠 양념의 치킨이 등장했고 곧이어 매콤한 떡볶이도 추가되고 바삭한 감자튀김은 서비스로 올라온다. 맥주가 조금씩 줄어들 때쯤 또 다른 잔을 채우며 이야기는 끊이질 않는다. 아…... 행복하다! 그리고 이 순간의 행복은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이런 순간이 더없이 특별하고 소중하다. 일상의 피곤함, 고단함에서 잠시 벗어나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함께 웃고 때로는 서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추억이 되기 대문이다. 맥주 한 잔, 두 잔, 그리고 석 잔째가 되면 점점 마음의 빗장이 풀어지고 우리는 더 단순해지고 솔직해진다. 내 머릿속을 옭아매던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여있던 상념과 고민들도 하나씩 사라지는 것만 같다.
매일같이 만나는 동네 절친들과의 대화는 언제나처럼 소소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지만 최근 들어 우리 이야기 주제는 단연 자녀들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이들이 요즘 모두 사춘기를 겪고 있기에 각자의 경험과 고민을 나누느라 바쁜데 이야기하는 사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다른 엄마들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다.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하는 안도감과 위안을 느끼고 각자 마음의 짐을 덜어내곤 한다. 아무리 부모라지만 10대 자녀들의 변덕스러운 감정 변화와 예민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겹고 아프고 외롭다. 하지만 이 길을 나 혼자만 걷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아주 큰 위로가 되어준다.
이렇게 동네 호프집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장소라기보다는 동네 사람들의 소통과 추억을 쌓는 공간, 참새 방앗간, 이 동네 만남의 장소 느낌이 강하다. 동네 호프집은 우리 일상의 작은 쉼표를 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게 해 준다. 그곳에서 나누는 이야기와 웃음, 그리고 우정은 마음 깊숙이 간직되어 앞으로도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줄 것이다. 이러니 내가 누가 불러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바로 동네 호프집으로 출동하는 게 아니겠는가! 집 앞에서 동네 친구들과 맥주 한잔이라니……오랜 꿈을 이루는 기분이라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않고 꿈만 같다. 그리고 이 꿈이 오래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