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유산
09/03/24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순전히 나의 아버지 덕분이다. 자라는 내내 아버지를 보면서 독서를 좋아하게 되었고 아버지를 보면서 쓰는 것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기회를 냉큼 받아들여 지금까지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니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일치감치 쓰는 것을 그만두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글을 읽거나 글을 쓰셨는데 어린 내가 봤을 때 그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교사이자 보이스카우트 지도자였던 아버지는 국내외로 여행을 많이 다니셨는데 그때마다 식구들에게 엽서나 편지를 보내주셨다. 각 개인에게 한 통씩 보내주셨기 때문에 나는 여직까지도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주신 엽서와 편지들을 아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식구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 아버지가 부재중일 때 엄마를 더 도와달라는 당부,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담긴 내용들을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아버지의 글들은 마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와도 같아서 이를 통해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존경은 더욱 견고히 쌓여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아버지는 내 눈에 참으로 근사해 보였다. 어린 나에게 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사실상 유일한) 멋있는 통찰자이고 철학자였다. 아버지가 입을 열거나 글을 쓰면 마치 무대 위의 명연주자라도 된 것처럼 단어 하나하나를 악보의 음표처럼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힘이 있었다. 자연스레 빠져들고 끝까지 집중하게 하는 흡입력 말이다. 적절한 유머와 비유는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어려운 주제도 쉽게 이해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와의 대화 시간을 즐겁게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글을 사랑하셨다.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부지런히 생활하시면서도 독서를 게을리하는 법이 없으셨고 때문에 아버지의 책장은 언제나 책으로 넘쳐났다. 어린 나는 그 책장을 몹시도 동경했다.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들이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궁금했고 마치 작은 우주라도 되는 냥 신비스러운 그 세상으로 빨리 들어가 보고 싶었다. 중고등학생이 되면서 드디어 아버지의 책장에 있는 책들을 한 권씩 꺼내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나는 몹시도 설레었다. 그리고 꿈꿨다. 언젠가 나도 이렇게 근사한 책장을 갖고 말겠다고…...

나만의 책장을 갖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내가 직접 번 돈으로 IKEA에서 조립식 책장으로 구매했고 그 당시 남자친구(현 남편)가 조립한 책장은 꽉 채우고도 공간이 부족해서 한 칸에 여러 권씩 겹쳐서 꽂아야만 했었다. 그 책장은 오래전에 처분했지만 책들은 그 이후로도 늘어나서 지금은 청소를 할 때마다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할 처지이다. 남편은 내게 오래된 책들은 정리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도 그럴 것이 국민학교 때 읽었던 책도 일부 보관 중) 하는데 언젠가 나의 서재가 생기면 그럴듯한 책장에 꽂아두어야지 하는 꿈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과연 언제쯤 서재가 생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의 책장이 그러했듯이 나의 책장도 누군가에게 작은 우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우리 아이들은 아직까지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없다. 아마도 내가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만큼 책을 많이 보지 않고 주로 휴대폰을 들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처럼 아이들에게 편지와 엽서를 보내는 대신 문자만 보내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요즘 사람들이 옛날만큼 책을 읽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는 문학의 유산을 내 자녀들에게 전해줄 수 없다면 뭔가 아쉽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도 내게 억지로 시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아버지를 보고 배웠고 따라 했을 뿐이다.

칠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읽고 쓰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계속해서 꿈을 꾼다. 책 속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녹여내고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아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아버지의 책장 속에서 나는 나의 꿈을 발견했고, 그 꿈 덕분에 부족하나마 이렇게 계속해서 뭔가를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운이 좋으면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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