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파란 아이
03/03/25  

부제: 싱크대 걸레받이

(이번 주 칼럼은 제 글이 아닌, 남편이 쓴 글을 대신 올립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가족이었던 고양이 ‘에이’를 떠나보내며 남편이 남긴 기록인데, 이 글을 독자분들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싱크대 걸레받이’라는 단어는 내게 아주 생소했다. 귤에 붙어 있는 하얀 실 같은 것이 ‘귤락’이라고 불린다는 걸 알았을 때도 낯설었지만, 그래도 ‘귤’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싱크대 걸레받이’는 달랐다. 이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아, 이걸 이렇게 부르는구나”라는 생각보다 “이걸 이렇게 부른다고?”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싱크대 걸레받이는 미국에는 없지만 한국에는 존재하는 물건이다. 주방 싱크대 하부장이 바닥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설치되면서 그 아래에 공간이 생기는데 그 공간을 가려주는 나무판을 ‘싱크대 걸레받이’라고 부른다. 누가, 언제부터 이렇게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귤락처럼 아무도 관심은 없지만 모두가 모르는 단어였다. 내가 이 단어를 알게 된 건 ‘눈이 파란 아이’ 덕분이었다. 내 기준으로는 마치 소련(연식이 있어 이 표현이 더 정감 간다) 사람처럼 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 덕분이었다.

2019년 겨울, 우리 집에 두 마리의 고양이가 들어왔다. ‘랙돌’이라는 품종이었다. 고양이를 들어 올렸을 때 저항 없이 온순하게 축 늘어져 있는다고 해서 Ragdoll(봉제인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원래 한 마리만 입양할 계획이었는데 평소 슈퍼 J였던 와이프는 그날따라 이상하게 피가 당기는 느낌이 든다며 두 마리를 즉흥적으로 입양했다. 귀여운 표정과 활발한 점프로 우리를 사로잡았던 아이가 와이프에게 꼭 안겼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 ‘엘’과 ‘에이’가 왔다. 엘은 여자아이, 에이는 남자아이였다. 와이프에게 안겼던 아이는 바로 에이였다.

운명이란 알 수 없고 때로는 참 얄궂다. 활발해 보이던 에이는 선천적인 심장 판막 기형을 가지고 있었다. 심장이 약해서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수의사는 설명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알 수 없지만 잘 먹고 잘 놀다가 보내주면 된다고 담담하면서도 따뜻하게 말했다. 하지만 설명과 달리 내 머리는 새하얘졌고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입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우리는 한국 내 저명한 심장 전문 수의사를 찾았고 듣도 보도 못한 심장 관련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같지만 설명은 달랐다. 앞선 수의사와는 달리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약을 먹이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심리 안정을 돕는 성분이 포함된 약으로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약을 먹이며 심장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목욕이나 격한 놀이를 피하며 살아갔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며칠 전 거짓말처럼 에이가 갑자기 떠났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비명을 지르며 나를 불렀다. 병원에 갈 틈도 없이, 인공호흡도 소용없이, 그렇게 떠났다.

에이는 엘보다(쏘리 엘) 지능이 높았다. 우리 부부를 깨우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다. 배고플 때는 비닐을 씹는 소리를 냈고(특히 바스락거리는 빳빳한 비닐을 좋아했지만 우리가 싫어하는 걸 알았다), 물이 필요할 때는 화장실 세면대나 부엌 싱크대로 뛰어 올라갔다. 화장실 청소가 필요할 때는 화장실 앞에서 헛발질을 하며 시선을 끌었다.

애교도 독특했다. 내 앞길을 가로막고 벌러덩 퍼져 눕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 보는척하며 곁눈질로 내가 어떻게 하나 보고 있었다. 질투도 많아 엘이 자던 자리를 꼭 빼앗았는데 방법이 영리했다. 우리 앞에서 마치 엘을 그루밍해 주는 척하며 핥아주다가 은근슬쩍 깨물었다(아주 살살).

그리고 에이에게는 스트레스를 푸는 본인만의 루틴이 있었다. 서랍을 열고 서랍 속 양말이나 수건 빼내기, 부엌 싱크대에 올라가 창밖 새 보기, 그리고 싱크대 걸레받이를 발로 차서 엎어버리기. 싱크대 걸레받이 차기는 크게 혼나지도 않고 바닥으로 쾅하고 엎어지는 소리가 재미있어서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는 놀이였다.

매번 걸레받이를 들어 올리는 게 귀찮아서 이걸 방지하려고 웹 검색을 하다가 ‘싱크대 걸레받이 고정 캡’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파는 곳도 많지 않고 철물점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생소한 제품이었다. 단가는 저렴했지만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솔직히 작년에 이 제품을 구했지만 결국 설치는 하지 않았다. 심장 때문에 잘 놀아주지도 못하는 에이가 재미있어하는 이 놀이마저 빼앗으면 에이의 유일한 놀이이자 낙마저 빼앗아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춘기 아이가 방문을 쾅 닫으며 화를 푸는 것처럼 에이도 이걸 차면서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결국 그대로 두었다. 대신 매일 아침 부엌으로 가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싱크대 걸레받이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걸레받이가 그대로 있었다. 다시 세울 필요가 없었다. 비닐을 씹는 소리도, 츄르를 달라며 내 다리에 제 머리를 부딪치는 일도, 집에 오면 꼬리로 내 다리를 감싸는 일도, 이제 더 이상 없었다.

세상에 호상이 어디 있겠는가. 4년을 버틴 게 기적이라는 수의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사실일지언정, 에이가 너무 보고 싶다.
곁에 있어도 만질 수 없었던 너, 늘 도도하게 거리를 두며 나를 지켜만 보던 너. 이제는 아예 보이지 않으니 너무 슬프구나. 너를 잃어 생긴 이 그리움과 슬픔이, 너와 함께한 세월의 기쁨을 희석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낯설고 내게는 너무도 버거운 단어다.
그 길을 떠난 너를 생각하며, 너를 기억하며, 오늘도 버텨본다.
사랑해, 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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