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다니는 아이 셋을 키우다보니 학교 스케줄을 꿰고있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일들이 생깁니다. 같은 학교에 다녀도 학년마다 수업 시간, 이벤트, 시험, 준비해야 할 과제 등이 제각기라꼼꼼히 챙기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학기 중에는 빨리 방학이 되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른 기상 시간과 도시락 준비, 아이들 픽업에서 해방된다는 기대감 때문이지만 사실상 방학이 다가오면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방학은 언제나 엄마들의 "휴~"하는 긴 한숨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갖가지 고민이 있겠지만 그 중의 제일은 방학 동안 아이들과 어떻게씨름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학교에 가 있으면 하루에 몇 시간씩 아이들 없이 나만의 시간이 생기는데 방학 기간 동안은 하루 종일 아이들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겠죠. 전에는 아이들과씨름한다는 표현이 다소 험악하고 쌀쌀맞게 느껴져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그말 속에서 엄마들의 노고가 애잔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릴 적 방학은 이랬습니다. 방학 한 달 전부터 방학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방학식 날 탐구생활 받아 들고 룰루랄라~ 신이 나서 집에 돌아옵니다. 일주일 동안은 열심히 교육방송 들으며 노트 필기하고 탐구생활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본 후 할 만한 페이지만 쓱쓱 미리 해둡니다. 누가 보면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 같아 보입니다. ㅋㅋ 엄마가 해주는 삼시 세끼에 맛있는 간식까지 먹으니 살이 포동 포동 찌기 시작합니다.
2주째 들어서면 엄마의 잔소리가 늘어갑니다. 늦잠 자지 마라, 옷 아무데나 벗어 놓지 마라, 음식 흘리고 먹지 마라, 머리 빗고 머리카락 주워라, 방학 숙제 미리 해라 등등 ……
에이…… 방학인데 좀 늦게까지 자면 어떠나…… 방학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숙제 좀
천천히 하면 어떠나…… 엄마가 야속하기만 합니다. 나는 커서 절대로 잔소리하는 엄마가 되지말아야지…... 아이들을 무시하는 어른이 되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해 봅니다.
3주째가 되면서 심심해서 몸이 비비 꼬입니다. 어서 빨리 개학해서 친구들과 놀고 싶습니다. 엄마는 오후가 되면 커피 한 잔 마시며 피곤하다 하십니다.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는데 뭐가 피곤하신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놀러 좀 가자는데 선뜻 결정을 못하고 눈을 흘기시는엄마가 야속해서 엄마 뒤에서 더 무섭게 눈을 흘깁니다.
개학 1주 전…… 밀린 숙제, 밀린 일기 쓰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숙제 얼마나 했는지 비교하느라 바쁩니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 방학 전에 입던 바지 지퍼를 올리는데 힘이 듭니다. 엄마는 숙제를 진작 해 놓지 않았다면서 야단을 치십니다. 도와주지도 않으시면서잔소리만 하는 엄마가 야멸차게 느껴져서 일기장에 "엄마는 너무해!"라고 적습니다.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그때 엄마가 왜 그리 잔소리를 하셨는지, 왜 그렇게 힘들어 하셨는지모두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루 중 단 한시간도 엄마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힘드셨겠구나. 삼시 세끼 매일 다른 메뉴로 영양까지 생각하시며 준비하시기 어려우셨겠구나.엄마에게 방학이 즐겁지만은 않은 이유를 열 개도 더 생각해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진작 좀 알았더라면 엄마를 위해 커피 한 잔 타드리며 힘내시라고 말씀 드렸을 텐데……밥 먹고 난 뒤 엄마대신 설겆이도 하고 머리카락도 열심히 주웠을 텐데…...
저도 이제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릴 적 다짐대로 내 아이에게 찌푸리고 짜증난 모습 대신 밝고힘찬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공부하라며 잔소리하는 대신 학기 중에는 할 수 없었던 가족여행도 가고 자연 학습도 계획할 수 있을까요? 이미 방학이 되면 아이들과 씨름하는 것이 걱정되어 한숨을 쉬는 엄마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를 야속하게 생각했던 내 어린 날을 기억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야 겠습니다. 내 아이의 일기장 어딘가에 "엄마는 너무해!"라고 쓰여 있을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