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안 셔츠와 아리랑
07/08/19  

2019 재미 한인 개척자 협의회(Korean American Pioneer Council) 오찬모임에 초대받았다. 2주 전에 초대를 받고 어떤 단체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한인 초창기 이민자들의 2세, 3세, 4세들이 만든 단체로 홈페이지(http://www.officialkapc.org)도 갖고 있었다. 홈페이지 첫 번째 화면에 빛이 바래 누르스름해진 흑백 사진이 뜬다. 적어도 6~7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모임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다. 사진 옆의 화살표를 클릭하면 2018년, 2019년 모임에서 찍은 사진이 화면에 나타난다. 사진을 보면서 단체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의 미국 이민 역사는 1903년 1월, 101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05년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이 일시 중단되기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들 중 84%는 20대의 젊은 남자들이었고 9% 가량이 여성들이었으며 7%가 어린이들이었다. 이러한 인구 구성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빠른 시기에 큰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려는 임시 체류자의 성격이 강했다.

 

하와이 한인사회는 결혼 연령의 여성들이 부족하여 1910년부터 한국에서 신부를 구하기 시작했다. 사진만 보고 결혼한다하여 이들을 ‘사진신부’라고 불렸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한인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그리고 115명의 신부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서 가정을 이루었다.

 

초기 한인 이민에 또 하나의 중요한 부류는 유학생들이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541명이 학생 신분으로 대학에서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 가운데에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운동을 하려고 온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하와이와 본토에서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서 부상했고 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된 초기 한인 이민 사회는 1945년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하와이 6,500명, 그리고 미국 본토-주로 캘리포니아이긴 하지만-에 3,000명가량이 한인들끼리 모여 살면서 미국 주류 사회와는 고립된 상태로 존재하였다. 이 초창기 이민자들의 후손들은 2019년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모임에 초대받고 어떤 옷을 입고 갈까 생각했다. 셔츠를 입고 그 위에 양복을 입고 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집을 나서서 한 블록을 지나는데 메시지가 떴다. 오늘 모임에 초대한 사람이다. 정장을 입지 말고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오라고 했다.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가서 하와이안 셔츠로 갈아입었다. 왜 하와이안 셔츠일까. 아마도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들이 하와이에서 대륙으로 건너왔을 거다. 그렇다 보니 하와이안 셔츠가 편하게 느껴질 거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과거와 현재를 구별하는 쉬운 방법 중의 하나가 우리가 입는 옷이 아닐까 싶다. 옛날에 찍은 사진과 요즈음에 찍은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이 옷이 바로 시대정신(時代情神)을 표현하고 있다고 얘기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철학적 의미의 시대정신(Zeitgeist)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글자 그대로 ‘어떤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정신자세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단순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한 시대의 역사적, 시대적 특수한 상황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으로 형성되어 그 시대의 정신문화를 끌어가는 보편적인 성향을 시대정신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혹자는 그 시대에 특유의 사회적 상식을 가리켜 '시대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초창기 하와이 이민 1세대들은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자녀인 2세들도 세상을 떠났거나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만 생존해 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거의 3세, 4세에 이르고 있었다. 모일 때마다 사람이 줄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으나 그 후손들은 아직도 과거의 시대정신을 잊지 않고 조금이라도 기억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와이안 셔츠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도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 조부모들의 시대정신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 아니겠는가.

 

32명이 모였다. 참석자 전원이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개인들 간의 대화는 물론 회의 진행도 영어로 했다. 모임의 성격상 한국어를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깜짝 놀랐다. 행사가 끝날 무렵 아리랑을 함께 부르기로 했다.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시작하면서 참석자들이 따라 불렀다. 그날 행사 순서지에 가사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1절, 2절, 3절까지 영문으로 친절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제대로 따라 부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앉아 있지만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들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1절을 마치면서 2절을 부르겠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그냥 1절을 다시 한 번 더 부르죠.” 아리랑 2절 가사는 발음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내가 무심코 한 한국말이 그들을 놀라게 한 모양이었다.

 

이 모임이 안타까워 보이지만 우리 이민 역사의 산 증인의 후손들이 한국말도 못 하면서 이렇게라도 모이는 것이 정말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다. 100 년 뒤에 2세, 3세 우리 후손들이 만나기라도 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도 고개를 저어 비관할 것이 아니라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시대의 흐름에 맡기는 편이 좋을 듯하다.

안창해. 타운뉴스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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