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국에 살 때 아이들을 한국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결혼 전에 한국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하며 2세들의 한글과 한국 문화 교육의 중요성을 누누히 강조했음에도 정작 내 아이들은 한국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교사로 봉사한 경험이 오히려 한국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된 것이다. 학생들 중 본인이 좋아서 오는 아이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모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에 가는데 토요일마저 늦잠을 자지 못하고 아침 식사까지 거르고 한국학교에 불려나오는 것에 대해 대단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교사이면서 마음 한구석은 그 아이들에게 항상 미안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학부모들의 바람과 달리 최대한 숙제는 덜 내주고 수업은 교과서와 상관 없이 좀 더 흥미롭고 재미있게 진행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이사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기로에 섰을 때 가장 먼저 걱정되었던 것이 아이들의 한국어 실력이었다. 집에서 한국어를 많이썼던 편이라 간단한 대화 정도는 가능했지만 제대로 한글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한국에서 일반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한국행이 결정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도 한국학교에 등록한 일이다. 아직 기저귀를 졸업하지 못한 막내만 제외하고 삼남매가 같이 한국 학교에 다니며 ㄱㄴㄷ을 배우고 자기 이름을 쓰고 한글로 어버이날 카드를 만들어오고 한국어 노래를 배워와 부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글은 ㄱㄴㄷ만 속성으로 배우고 한국에서 1학년 2학기에 진학한 딸은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매주 받아쓰기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학부모로서 첫 경험을 시작한 나는 딸의 받아쓰기 시험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딸은 첫 받아쓰기에서 빵점을 받아왔다. 열 문제 가운데 단 하나도 제대로 받아쓴 것이 없었다. 저 나름으로는 받아쓰기란을 공백으로 두지 않고 연필로 꼭꼭 눌러 써서 채웠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딸이 쓴 글자들이 무슨 단어를 쓴 것인지 당최 유추해낼 수조차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무지하고 느긋했던 엄마를 더 당혹하게 한 것은 채점한 받아쓰기 시험지에 담임선생님이 남긴 노트였다. "공부 좀 합시다!"
그래, 공부하면 되지 뭐. 언제까지 빵점만 받아오겠어?
그래서 나는 빵점이 뭔지도 잘 모르는 딸에게 말했다.
“딸아, 괜찮아. 첫 시험이었고 공부도 안 했으니 빵점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 다음 시험에는 딱 2개만 공부해가서 2개만 확실하게 맞아보자. 그리고 그 다음 시험엔 3개, 4개 그런식으로 하나씩 늘려가면 되잖아. 그치? 그렇게 할 수 있지?”
딸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시험에서 정말 딱 두 개만 공부하고 그 두 개는 틀리지않고 20점을 받아 왔다. 두 개만 공부하라고 말하면서도 어쩌면 하는 김에 몇 개 더 공부해 주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것은 역시 엄마의 과욕이고 착각이었다. 이럴 때만 엄마 말을 곧이곧대로 잘 듣는 딸은 최근 시험에서 7개를 맞아 70점을 받아 왔고 내일 있을 시험 목표는 80점이다. 이제 고작 1학년인데 시험 전날이면 한두 시간씩 꼬박 받아쓰기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이 조금은 짠해보이기도 하다. (지금도 딸은 등교 준비를 마치고 받아쓰기 공부 중)
딸이 지난번 시험에서 70점을 받아 왔을 때 나는 쾌재를 부르며 좋아했고 빵점 맞은 날부터 함께 응원했던 온 가족과 친구들, 학습지 선생님에게도 자랑을 했다. 모두들 마치 전교 1등이라도 한 것처럼 좋아들 해 주었다. 앞으로 받아쓰기뿐만이겠는가. 수없이 많은 시험과 평가와 마주해야 하고 그로 인해 울고 웃을 일이 끊이지 않을 텐데 그저 아이들이 좌절하지않고 당당히 맞서주기를 빌어본다. 그리고 너무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어질 때 부디 엄마에게 도망 와 주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