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기 인생(루가 13,22-30 (다))
07/03/23  

“신부님 입에서는 언제나 하느님 사랑이나, 인간 사랑이니 말씀만 하시니 한마디 말씀으로 ‘인간의 사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말은 어느 소녀의 사랑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당돌하고도 진지한 물음이었습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이란 멀고도 가까운 것이며, 넓고도 길고 높은 것이라고 그렇게 간단히 노래 부를 수만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란 네모가 났는지, 세모가 났는지 둥근지도 모르지만 끝이 없고 한이 없다던 옛 사람들의 말처럼 참된 사랑을 인간의 한정된 한마디 말로써 나타낼 수가 있겠습니까? 한참 망설이던 나는 묻고 있는 소녀 뒷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사랑이 저 십자가가 표하는 끊임없는 “더하기 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부애는 홀로 있던 한 인간이 혼인성사로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여기서 또 모성애가 나오고, 한정되고 제한되어 테두리져 있는 인간들끼리 서로 더하기가 되어 우정이니 이웃이니, 인간애니 조국애니, 형제애니 하는 모든 애정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을 다하고 지력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대하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비슷하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새 계명도 사실 따지고 계산해 보면 부족하고 한정된 나란 인간을 계속 더해 가서 하느님과 같이 완전한 인간이 되라는 사랑의 가르침과, 재촉이라 생각됩니다.

사랑과 고통은 우리 인간 앞에 더하기(+)표로, 십자가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꼭 한 가지를 가르치시고 싶어하십니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고통은 우리 인간 앞에 사랑하는 십자가 형태인 “더하기 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을 잡으려 할 때 그 인간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만나 뵙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무수한 인간들이 너와 나, 그대들과 우리들인 간간 관계로만 끝날 때, 횡적인 관계만으로 끝날 때, ‘빼기표’(-)로 나타나는 피해 의식과 손해만 본다고 사랑의 원망과 한탄만을 되씹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자 인생이란 말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달이 가고, 날이 가도 수많은 대인 관계에서 다시 받을 길 없는 사랑과 배반과 배신! 이전 사랑할 기력마저 핍진한 듯 더 이상 뼈와 살을 빼앗긴 사랑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것, 인간의 무리! 낙오 대열! 잉여인간들! 확실히 그들의 인생 계산법에 착오와 잘못됨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 세상의 탓도, 그런 인생의 계산으로 이 세상에서 성공한 것같이 보이는 인간들의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이며 “엑스트라”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내 인생은 내가 계산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남들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며, 최후에 내가 하느님 앞에 셈바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일생을 의심하는 마음으로 돌아다보면 이웃 사람들과 대인 관계에서 무수히 빼앗기기만 하고 손해만 당한다고 생각하는 느낌은 “깨닫지 못하는 사랑의 어두운 그림자”임을 능동적으로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너와 나의 인간관계만을 보고 그 위에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신앙생활을 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할 때마다 머리와 가슴과 양 어깨에 성호경을 그으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것은 더하기를 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 내 이웃과 당신을 더해 가렵니다.”라고 사랑의 약속과 더하기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성호경을 그을 때마다 더하기(+) 인생 계산법으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적자가 아니라 흑자 인생인 것입니다. 흑자 인생을 이룩해 나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참된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백명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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