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과 천당은 한집안이다
07/31/23  

법문을 할 때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고 나서 시작합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르고 나면 죽는 큰 죄, 팔백겁의 죄를 녹여 버리는 공덕이 생깁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 부른 공덕이 이러할진대 참선의 공덕은 말할 것도 없지요.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생기는 좋은 일, 나쁜 일 모두가 자신으로부터 비롯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잊고 사는 것 같아요.
모두가 남의 탓만 하고 앉아 있어요. 이는 죄받을 일, 죽을 일을 만들고 앉아 있는 것과 똑같아요. 모두가 “내 놀음” 입니다. 내 마음, 내 공로만큼 받는 것이니 가만있어도 부처님이 복을 지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더는 없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내 마음”을 몰라가지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물질이 풍부하든 그렇지 못하든 내 마음을 모른다면 귀신이 중간에 끼어들어 속이고 다니며 죽을 길로 끌고 갑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나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입니다. 행복은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조금치라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 가서 행복을 찾으려고 야단이니 어서 빨리 내 마음을 찾는 공부를 해야지요.

내 마음속에 보물이 있는데 밖에서 구하려고 하니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콧구멍 속에 시방세계가 들어있고, 귓구멍 속에 한량없는 부처님 나라가 다 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깨치고 보면 시방세계가 모두 나로부터 나오고, 하늘과 땅, 해와 달을 내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도는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물건과 같이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천 분이 나타나신다 해도 나의 일은 모릅니다. 자기 마음은 오로지 자기가 깨달아 써먹어야지요.
팔만대장경을 다 외운다고 하더라도 “이 뭐꼬?” 하며 참선만 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합니다. 도라는 것은 오직 내가 깨닫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이지요. 참선보다 더 큰 기도는 없고, 참선은 곧 활구요, 정법이요, 부처입니다.
부처의 ‘佛(불)’ 자를 몰라도 부처님이 참선을 해서 부처가 되었다는, 이 뜻을 아는 사람은 그대로 “살 길”을 만난 겁니다.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참선 공부를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법을 만났다면, 이보다 더 복이 많은 사람은 없겠지요.

마음자리에서 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터럭 끝만도 못한 것인데 사람들은 내 아들, 내 딸 하면서 집착하고 또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옛날, 부처님 시대에 어느 집에서든 아이만 낳으면 잡아다가 자기 새끼에게 먹이는 귀신이 있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귀신의 버릇을 고치려고 그가 제일 사랑하고 아끼는 막내아들을 빼앗아 왔습니다. 귀신은 애가 타서 부처님을 찾아와서는 “내 막내아들이 없어졌으니 부처님의 도력으로 찾아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했어요.
그러자 부처님은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만나고 싶거든 이제부터는 사람을 잡아다가 먹이지 말아라”하시며, 바릿대에 담아 두었던 귀신의 막내아들을 내어주더랍니다. 이때부터 귀신은 바릿대 물을 먹고 살았고,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복을 짓고 살아봐야 나고 죽는 씨앗이 되어 버려 천상의 불구덩이밖에 못 가고, 불구덩이에 가면 도로 지옥에 가지요. 지옥과 천당은 한집안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것만이 고생이 아닙니다. 나고 죽으러 다니는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고 죽는 일이 없는 극락세계가 있는데 왜 사서 그러한 고생길을 만듭니까? 부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그대로가 극락이에요. 부처님의 은혜를 하늘과 땅에 비할 수가 있습니까? 이 한 몸 다 바쳐도 부처님의 은혜를 갚지 못합니다. 도인이 되어 중생을 제도할 때에 그분의 은혜를 갚을 수 있지 물질적으로는 갚지 못합니다.

참선 열심히 해서 부처가 됩시다. 참선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정진하기 바랍니다.


혜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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