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사랑의 길(마태오 16, 21-27 (가))
10/02/23  

십자가의 길이라 하면 어딘가 무겁고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사랑의 길이라 하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감을 갖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고 불가분의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당신의 제자가 되는 유일무이한 길이란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하시려고 오신 것도 사랑에서이며 인류 구원이란 대사업도 십자가상의 사랑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이며 성부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모습입니다. 천주 성부의 준엄하신 정의와 공의하심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천주 성부의 태도와 예수님의 태도는 조금도 대립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성부이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발로의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천주 성부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 붙이심으로써 정말로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합니다(요한 3:16). 성부께서 예수님을 지상에 파견하실 적에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바라시고 또 명하신 것은 오직 사랑의 길을 최후까지 거닐어라, 또한 사랑의 힘으로 죄악의 권세에 승리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죄악이 팽창한 사회에서 타협할 줄 모르는 예수님의 사랑이 죄로 마비된 당신의 인간들과 충돌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죄악으로 눈이 어두워진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의 활동은 자기들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요 위험한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사코 예수님을 살해하여 세상에서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사람, 일체의 이기주의를 떠나 자신을 방어할 권력을 포기한 사람은 온전히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여 천사들의 정예부대에 원조를 청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몸을 숨시기려고도, 당신의 교훈을 철회하시려고도, 당신의 태도를 고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의 사형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보다 훨씬 더 쉽고 가벼운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하는 말씀 한 마디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최고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십자가상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성부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상에 달리심으로써 인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당신 자신만이 십자가를 통하여, 즉 수고 수난과 죽음이란 형극의 길을 걸었고 당신이 가장 사랑하시는 직제자들 즉 사도들도 이런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들에게 각별히 어려움과 고통과 단련을 받게 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명시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하신 말씀이 오늘처럼 실감 있게 들려오는 때가 없었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도 우리에게 좋은 존재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입에는 쓴 약이 병에는 좋다는 격이겠지요.

십자가처럼 우리를 천국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의 길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즉 고통의 길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인간을 구원하는데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김정진 신부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