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고자 하는 왕은 가시관을 쓴다 (요한 18, 33-37 (나))
12/11/23  

30여년 전 소신학교에 입학한 후 어느 가을날 웅변대회가 있었다. 여러 명이 나온 가운데 선배 한 분이 들고 나온 웅변 제목은 특이한 것이었다. 그 제목의 이름은 ‘왕 중의 왕은 가시관을'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런 제목을 들고 나왔나 하여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경청하였다. 지금이야 그 선배의 웅변 내용을 거의 다 잊었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줄거리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왕들은 금관을 쓰는데, 왕들 중에서 최고 왕이신 예수님은 금관은커녕 가시관을 쓰셨다. 지배하고자 하는 왕은 금관을 쓰지만, 섬기고자 하는 왕은 가시관을 쓴다.
거짓된 왕은 금관을 쓰지만, 진리의 왕은 가시관을 쓴다. 위선과 교만의 왕은 금관을 쓰지만, 정의와 겸손의 왕은 가시관을 쓴다. 힘으로 짓밟고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왕은 금관을 쓰지만,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왕은 가시관을 쓴다.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나선 우리 신학도들이여, 빛나는 금관이 아니라 피 흐르는 가시관을 받아쓰자"는 것이 그 선배의 웅변 내용이었다.

교회는 매년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는 왕이시다'고 고백하는 주일로 지낸다. 그리스도는 세속적으로 권력을 부리고 명령을 하고, 힘을 쓰는 왕이 아니라 사랑의 왕, 봉사의 왕, 진리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는 누구나 사랑하고 섬기는데 있어서, 왕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한다.

최근 우리나라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는데, 하나같이 금관 쓰기를 요구할 뿐 가시관 받기를 원하지 않는 듯하여, 마음 한구석이 시린 듯 저려온다. 남의 잘못이나 떠들어대고, 약속과 신의를 배반하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서, 왕이 되려고 할 뿐 정직하고, 진실되고, 사랑으로 섬김으로 왕이 되려고 흉내조차 내는 이 없어, 답답할 뿐이다.

이 시대는, 짓밟고 올라서는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떠받들고 섬기는 왕이 필요하다. 이 시대는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왕이 필요한 게 아니라, 쓰러져 가는 가정을, 황폐화되는 인성을 어루만져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왕이 필요하다,

인도의 데레사 수녀가, 살아 생전 어떤 병든 어린이 하나를 안고, 그 아이에게서 흐르는 고름을 치료하고 있을 때, 기자 한 사람이 곁에 가서 데레사 수녀에게 물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사는 사람, 권력과 명예가 높은 사람, 평안하게 즐기며 사는 사람들을 볼 때 부럽거나, 시기심이나, 질투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데레사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까요.”

사랑하고 섬기는데 있어 가히 왕의 자리를 터득한 한 여인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숭고한가! 이 시대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모습이 허리를 굽혀 사랑하고 봉사하는 왕이 된다면, 얼마나 축복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몇 사람을 밟고 살았는가'가 아니라, ‘몇 사람이나 섬기며 살았는가'가 우리 삶의 제목이 되어야겠다. 짓밟고 일어서서 얻은 금관이 아니라, 섬기며 얻은 가시관을 삶의 보물로 여기는 지혜를 터득해야겠다.

우리가 따르는 왕이신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왕들 중의 왕이시온데 그 분의 머리에 얹힌 관은, 백성을 힘으로 내리누르고 거짓과 음모, 위선과 가면으로 얹혀진 금관이 아니라, 위를 쳐다볼 시간조차 없도록 사랑으로 겸손으로 섬김으로써 얻은 가시관일 뿐이다. 남을 짓밟으로써 얻은 금관을 쓰고 있는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기 위하여 사랑으로 섬김으로써 얻은 가시관을 쓰고 서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나는 빌라도의 금관을 선택하는가? 그리스도의 가시관을 선택하는가?

김영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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