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잘못과 하느님의 자비(루가 6,27-38 (다))
01/22/24  

우리는 잘못한 후, 고백의 성사를 보고 죄의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에 떨어질 때마다 몇 번이고 고해성사를 봅니다. 그러나 같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 몇 번이고 반복될 때 우리는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남을 용서할 때 같은 잘못에 있어 두세 번은 용서하지만 그 이상은 용서해 주는 것이 잘 안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나의 거듭 범하는 죄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실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좁은 자기 마음에 비추어서 하느님의 마음을 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모욕과 모독을 준 죄인이라도 한없는 자비로 그들의 회심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통회의 마음으로 주께 돌아오기를 바라는 죄인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잊으시고 반겨 안아 주십니다. 언젠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가까운 자들을 용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대한 예수님의 관대한 태도를 이상히 생각하여 “주님 저는 몇 번이나 제 형제가 제게 잘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시오(마태 18,22)”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손으로 만들어진 하나 하나의 피조물 위에 풍부하게 흐르고 있고, 그 마음의 부르짖음은 예언자의 입을 빌어 ‘여인이 자기 아기를 잊고 자기 뱃속에서 난 아들을 가엾게 아니 볼 수 있겠느뇨. 그 여인들이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노라(민수 39, 15)’고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절대적이며 무조건인 것으로, 여하한 인간의 반역에 대해서도 분노와 증오를 품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위에 베푸시는 자비도 한층 더 풍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애정의 최고의 표현을 십자가 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하느님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을 건 애정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의인을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탕자의 비유 말씀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지상의 아들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탕자인 작은아들은 단조로운 집안살림에 지쳐서 잔소리를 퍼붓고 자기 책임을 회피했으며, 형을 시기하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자기 집을 등지고 멀리 떠나 가버렸습니다. 고향과 집을 등진 그는 이따금 그는 자기 집을 등지고 멀리 떠나 가버렸습니다. 고향과 집을 등진 그는 이따금 남이 집 대문을 두드리고 동냥을 청하거나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금전과 건강을 낭비했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돈이 떨어지고 자기 주위에 있던 여자들도 사라지고 음악도 끝났습니다.

어느 고요하고 추운 밤, 마지막 희미한 희망의 빛이 그의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즉, 속을 태우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고향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귀가는 큰아들의 시기와 분노로 인하여 난관에 부딪쳤으나, 아버지의 자비심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용서했습니다.

이 지상에서 우리의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는 화해의 성사 곧 고백의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아프고 지친 인간의 마음은 이해와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자비와 용서의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죄인인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계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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